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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례이야기] 치사한 고참

1998년 2월 1일

사병들은 대개 휴게실에서 과자나 라면을 사먹고 티켓을 끊는데, 월급날이면 티켓이 행정계로 돌아와서 월급에서 까는 식이었다. 대개 고참들은 짬밥을 싫어하므로 티켓이 월급을 넘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무실별로 월급이 나가므로 사무실 쫄병 월급에서까지 마저 까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런데 다른 사무실 고참들은 자기가 쓴 돈이니까 쫄병 월급은 사비로 갚아주는데 삼례는 제대하는 그날까지 한 푼도 갚지 않았다. 게다가 뭘 그렇게 처먹는지 내 월급까지 몽땅 까고도 한 만원 정도 휴게실에 빚이 더 남아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니까 대략 16개월간 내 돈 약 이십만원을 떼먹고 제대한 셈인데, 내가 전생에 죄를 오지게 지었나 보다 하고 일찌감치 포기해버렸다.
심지어는 왕고참인 윤 병장이 제대할 때, 이만원짜리 벨트와 지갑을 선물하는데 자기가 돈이 없다고 나보고 자기 것까지 내주면 (사러갈 때까지 만원씩 내자고 하더니 물건을 사는 현장에서) 다음에 갚겠다는 것이다. 행여 네가 돈을 갚겠느냐고 생각하고 그냥 내가 냈다. 그리고 삼례는 정말 안 갚았다.

지가 무슨 대단한 스포츠 맨이라고, 틈만 나면 농구와 테니스를 즐겼다. (테니스 라켓은 우리 사무실 하사관들의 것을 허락도 없이 사용했는데 줄 많이 끊어먹었다) 농구는 뭐 자기가 키만 조금 더 컸으면 마이클 조던이라나 하면서 설치고 다녔는데, 뭐 그렇게 눈이 번쩍 뜨일만큼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다. 슛이 정확한 편이긴 했지만 폼이 뻔해서 내가 일곱번을 연속으로 블로킹을 했었으니까. (자기 키 작은 건 생각 안하고 열받고 그러대) 그러고도 자기가 잘한다는 착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해 언젠가는 나하고 다른 쫄병하고 둘이 먹고 자기 한 사람하고 1:2로 시합을 하자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1:2는 정말 마이클 조던 쯤 되지 않고는 시합이 안된다. 예상대로 10:0이던가 뭐 그렇게 우리가 이겼다. 짜식이 열받고 그러대.
그러고도 자기 실력이 뛰어나다는 착각은 계속 됐다. 187cm인 쫄병이 새로 전입오자 (농구도 잘 했다) 끌고가서 자신의 맞상대로 뛰게 했는데, 결과는 뻔한 거고 하여튼 군대란 곳은 이등병이 마음놓고 농구장에서 농구를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 신병은 돌아오자마자 죽사발이 되었다. 나중에 내가 가서 위로했다. 네가 재수가 없는 거라고.
또 다른 쫄병이 테니스를 잘 친다고 하자 삼례는 그 놈도 끌고나가려고 했다. 우리들은 고참들에게 들키면 집합이 걸릴테니까 그 쫄병 놈을 관물함에 숨겨놓는 등(야, 그 속에 사람도 들어갈 수가 있다는 사실 처음 알았다)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그 놈은 테니스장으로 끌려내려가야 했다. 물론 올라와서는 무진장 맞았다. 나중에 삼례가 그 쫄병에게 그랬단다. “나하고 테니스쳤다고 고참들한테 맞았지.” “네(울면서)” “알았어. 가자, 테니스장에.”

일병 2호봉인가 되서 쫄병들도 많이 생겼을 무렵인데, 갑자기 청소 조를 편성하는 일병 선임이 나보고 화장실을 청소하라는게 아닌가.(표정도 되게 안됐다는 표정으로) 화장실은 갓 전입온 신병이 맡는 게 당연한데 위에 몇 명 없는 단계인 나보고 화장실이라니. 그래도 워낙 천성이 선량하기 때문에(어, 왜들 토하지?) 그냥 알겠다고 했더니 고참 말이 “난들 이러고 싶겠냐, 고참이 시키니까…” 그무렵에 고참하고 트러블이 생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놈이야? 그러고 말았는데 생각해보니 그날 사무실에서 내가 삼례 신경을 좀 건드렸었다. 사무실에서 생긴 일을 내무반까지 끌고 들어와? 드러운 자식…

소크라테스가 말하길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된다던데, 나는 그 말을 정말 공감한다. 사무실 왕고참이었던 윤 병장이 제대하고나서 사무실에 새로 신병을 받았는데, 제법 똘똘하고 일도 잘 하는 놈이었다. 이 놈이 사무실에서 근무한 지 일주일인가만에 나한테 아주 절절한 목소리로 묻기를, “배 병장하고 어떻게 그동안 근무를 하셨습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살다보면 도사가 되느니라.” 그 놈도 결국 한 달만에 도사가 되어 삼례가 뭐라고 떠들 때면 두 사람 다 창밖만 쳐다보며 “어허, 어디서 개가 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