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브이 성공의 뒷면

<태권브이 부활 프로젝트>라는 사이트의 이름을 들어본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가고 말았다. 많은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떠있는 무궁무진한 자료라는 것들이 대부분 최신유행에만 편승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자신들이 소중하게 오랜 세월 간직해온 자료들을 인터넷에 풀기 시작하고, 거기다가 IMF에 따른 복고바람, 옛것에 대한 향수가 인터넷까지 뻗쳐나오면서 이 태권브이 부활 프로젝트라는 이름은 이제 상당히 낯익게 느껴지게 되고 말았다.

나도 재작년 가을인가 겨울쯤에 우연찮게 태권브이 사이트를 알게되어 거기에서 토론도 하고, 글도 남기고, 아직도 심심찮게 들락거리곤 한다. 그곳에는 한국애니메이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사람도 있고, 태권브이에 대한 향수와 애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저 태권브이 비디오물이나 얻어가려는 속이 빤한 인간들도 있다. 이 바닥이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곳을 처음 들어갔을 때의 느낌부터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과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이제는 필름조차 찾기 힘들어진 (이 사이트가 생기면서 많은 움직임이 일어, 지금은 비록 많이 훼손되긴 했어도 1탄 필름을 찾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둔 바가 있기는 하다) 태권브이에 대한 많은 자료들과 통신망에 돌아다니던 태권브이에 대한 각종 글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나의 신경을 따닥 건드린 것은 “마징가와 태권브이”를 비교하며 써놓은 글이었다.

참으로 미안하지만, 나는 태권브이를 마징가 제트의 표절로, 많이 봐줘도 아류작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가 태권브이를 평가 절하하느냐, 천만에. 나는 분명히 밝히는데 태권브이를 마징가 제트보다 훨씬 재밌게 본 사람이며, 마징가 제트보다 태권브이가 훨씬 뛰어난 작품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인 것이다. 태권브이는 마징가의 아류일 수밖에 없다.

뭐 아이디어를 빼왔다고 해도 더 뛰어나면 되는 것 아닌가. 일본이 라디오/녹음기를 발명하지 못했지만 워크맨을 발명하여 세계를 장악하지 않았는가. 태권브이와 마징가 제트도 그런 맥락에서 봐주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항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충분히 받아들여준다. 그러나 나는 고집스럽게 “아류론”을 주장할란다. 왜냐하면, 이 점을 간과해버리고 지금의 한국 애니메이션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애니메이션의 현실, 더 나아가 그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내가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본 적은 없지만 얼추 줄거리를 엮어낼만큼은 안다.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을 시작으로, <호피와 차돌바위>라는 작품이 있었고, 그 뒤에 어떤 극장용 만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거의 언급이 없는 걸로 봐서 있었어도 흥행에 실패한 작품일 게다. 그리고 나온 것이 <로보트 태권브이>다.

잡설 하나… 로보트 태권브이에서 로보트…는 국문법상 틀린 표기이므로 로봇 태권브이로 표기해야된다고, 주장하고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의 제목은 문법을 떠나서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아니면, 옛날에 발매된 태권브이 LP판 커버나 포스터를 죄다 “로봇 태권브이”로 뜯어고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태권브이는 흥행에 성공했다. 개봉관에 며칠만에 몇만이 들어왔다… 그런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지는 않겠다. (모르니까…) 하여튼 성공했다. 그 뒤에 나온 2편도, 3편도 성공했다. 그리고 극장용 로봇만화는 말그래도 쏟아져나오다시피 나왔다. 그 당시 분명히 어린이였던 나는 신림극장에 만화만 들어왔다 하면 (지금은 허물어진 신림극장은 재재개봉관이었다) 형님 손잡고 쭐레쭐레 극장으로 가는게 일이었다. 하도 많이 봐서 요즘은 내가 뭘 보고 자랐는지를 헷갈릴 정도라 그 리스트를 뽑아드릴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보기는 진짜 많이 봤는데…

그런데 그 작품들을 새삼 떠올려보면… 말그대로 표절작이었다. 얼른 생각나는 것만 나열해도 (기억이 틀린 것도 있겠지만 양해바란다) <그랜다이저>의 몸체를 똑같이 베꼈던 <마징가 엑스>라는 놈이 있었고, <독수리 오형제>의 캐릭터에 <가이킹>의 머리를 빌려온 <철인 007>이 있었다. <우주전함 야마토>를 베껴그린 <우주전함 거북선>, (거북머리만 얹어놓으면 다냐?) 제목만 들어도 뭘 베꼈는지 팍 느낌이 오는 <날으는 원더공주>, <독수리 오형제>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 너무나 틀림없는 (포스터 분위기도 비슷한) <흰독수리>가 있었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리스트로 글을 떼우기 싫으니 이쯤 해두겠다. 물론 그 와중에도 별로 표절이라는 혐의를 받지 않았던 작품도 있었다. <똘이장군>이 <타잔>의 표절작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면 태권브이는 어떤가. 무엇이 마징가 제트와 비슷한가. 그냥 모양이 비슷하다? 분명 모양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 메카닉 디자인은 마징가 제트를 베이스에 깔고 변형을 준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 태권브이의 머리가 장수의 투구 모습이고, 팔에 뿔을 집어넣었다고 해서 그것이 “베낀 로봇”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천만에 말씀이다.
스토리는 어떤가. 다음을 읽어보자. 두 명의 친한 과학자 중 한 명이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묘한 야망을 품고 로봇 개발에 주력하고, 나머지 과학자는 그의 야욕을 막기 위해 정말 강한 로봇을 만들다가 아쉽게 살해된다. 그의 혈육이 다른 박사의 도움을 빌어 로봇을 조종해 악당 로봇을 무찌르고, 세계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고유명사를 제외하면 마징가 제트와 태권브이의 기본 줄거리는 이처럼 거의 똑같다. 누가 봐도 태권브이는 마징가의 영향을 받아, 마징가를 본따서 제작된 작품이다. 설마 이 사실을 부정하려는 사람은 없겠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태권브이가 마징가 제트를 모방하며 출발했다는 이유로 내가 태권브이를 평가 절하한다면 나는 이런 글을 쓰기 시작하지도 않았다. 태권브이는 태권브이 나름의 장점을 분명히 갖고 있고, 마징가와는 또다른 의미를 한국 애니메이션 안에서 갖고 있는 작품이다. 만약 태권브이가 마징가를 베꼈으니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주장한다면, 철완 아톰이 미키마우스에서 디자인을 빌려왔으므로 형편없는 작품이다 라는 말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물론 미키 마우스 -> 아톰의 경우보다는 덜 개성적이고 덜 발전적인 베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글을 끌고 왔는지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겠다. 태권브이의 성공 이후, 어쩌면 그렇게도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은 표절작품들만 줄줄이 쏟아질 수가 있었을까. 물론 70년대에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만 8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 극장 애니메이션은 거의 표절/모방의 천국이 되다시피 하였다. 나는 그 이유를 태권브이의 성공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썩어빠진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것들은, 태권브이의 성공을 “마징가를 베껴서 성공한 작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냥 편하게 베끼고 모방하며 만들어도 성공한다, 그정도의 안일함이 아니라, 베끼지 않으면 뒤떨어진다고까지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80년대의 그 화려한 표절작 리스트들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들은 일본 꺼를 베껴야만 선진기법을 도입했다는 소리도 듣고, 흥행에도 유리하며, 태권브이가 그런 성공의 한 예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서두에 말했던 <태권브이 부활 프로젝트> 사이트가 초창기였을 무렵, 나는 그 곳에서 “태권브이 표절론”을 들고 나온 적이 있었다. 말빨 좋은 태권브이 매니아들과 길게 싸움은 되지 못했지만, 내가 굳이 그 이야기를 들고 나온 이유는 당시 그 사이트에서 태권브이의 마징가 표절(또는 모방)에 대해서 면죄부를 부여하는 입장만 취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태권브이의 성공이 잘못 인식되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를 그냥 어영부영 덮어버리는 것은 매니아들에게는 달가울지 몰라도 애니메이션의 장기적 발전에서는 독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비를 걸었었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외칠 수 있다. “태권브이는 마징가를 표절했다. 그것이 우리 애니메이션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발자국이었다”라고. 사람들은 나의 이런 주장이 모처럼 일고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부흥에 찬 물을 끼얹는 반동적인 행위라고 반박하지만, 나는 잘못 끼운 첫단추를 바로 인식하지 않고는 절대로 나머지 단추를 똑바로 끼울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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