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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이야기, 2주가 지나서

2005년 12월 19일

홈페이지를 만 8년(이틀 남았다) 운영해오고 있지만,
소위 핫이슈(Hot Issue)에 대한 글을 홈페이지에 올린 거의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냐,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요즘은 좀 발길이 뜸해졌지만 예전에는 노친네사이트(내가 부르는 이름. 나잇살 대충 드셔서 머리에는 빨갱이타도와 박정희만세와 전라도개새끼만 들어있는 분들이 주로 서식하는 정체모를 인터넷공간이 하나 있었더랬다)에 상주하면서 곱게 늙어가시는 분들 혈압깨나 올려드린 적도 있었고
기타 몇몇 내가 자주 가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시사적인 주제가 붙으면
대빵 긴 문장들로 (시간이 많았으니까…) 이빨 부서지게 싸우곤 했었다.
다만 홈페이지에는 그런 글을 안썼다 뿐이지.

문득 생각나서 잠깐 딴 이야기를 하겠다.
언급한 노친네사이트의 수준을 알만한 에피소드인데
부산에 사신다는 모 아저씨(인지 할아버지인지)가 분연히 타이핑하신 글에 따르면
평소 정부(당시는 김대중)에 반대하는 글을 자주 올린 덕분에
자신의 인터넷사용이 정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단다.
오! 인터넷사용을 국가가 감시한다! 이거 얘깃거리된다! 그 증거는!
…자기가 인터넷을 하려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으라고 한단다.
……..
…그밖에도 ‘내가 글을 쓰고 입력을 누르면 저장중이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그 사이에 내 글을 국정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라는 식의
웃어넘기기도 힘든 이야기들이 더 있었는데 첫문장이 워낙 강렬해서 다 잊어먹었다.

그럼 왜 홈페이지에는 그런 시사적인 글을 별로 안쓰느냐.
(다른 사이트에 썼던 글은 거의 책 한 권 분량 될텐데)
인간이 투쟁적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토론이나 논쟁을 좋아하다보니
여러 사람 북적거리는 커뮤니티에서 남과 이빨 부딪혀 싸우는 글은 써도
상대가 없이 그냥 나 혼자 넋두리하는 공간인 홈페이지에는
가급적 그런 논쟁적인 글을 쓰지 않는 것뿐이다.
(아시다시피 내 홈페이지, 댓글기능 없다)

물론 시사성있는 핫이슈가 아니라고 해도
홈페이지에 있는 내 글에 시비거는 사람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내가 에반게리온 까댄 글이었고…
왕가위 깠다고 욕먹은 적도 있었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야 괜히 지가 보다가 뿔이 나서 덤벼든 거지,
내가 “덤벼라!” 라고 도발적으로 쓴 거는 아니라는 말이지.
에반게리온 글 같은 경우는 어떤 방문객이 그 글을 떡하니
에반게리온 팬사이트에 퍼다놓는 바람에 괜히 욕만 먹고 그랬는데…
내가 아무리 쌈질을 좋아해도 팬사이트에까지 가서 불을 지르는 몰상식한 인간은 아니다.
(그럼 니가 여태 쓴 글이 도발적인 수준이 아니란 말이냐, 라고 되물으실지 모르겠으나
내가 도발하려고 맘먹고 쓰면 홈페이지에 쓰는 글 정도는 솔직히 장난이다)

2주 전에 황우석 교수 관련된 잡다한 글을 썼던 것도
황우석 교수건 PD수첩이건 어느 한 쪽 붙잡고 늘어지려고 맘먹고 썼으면
그렇게 부드럽게 안썼다.
황교수건 MBC건 별로 잘한 건 없어보이는데
그 와중에 불처럼 일어나서 자기들이 무슨 성전(聖戰)이라도 치르는 양
울며 불며 댓글놀이 해대는 인간들이 한심해서 넋두리한 정도. 그거뿐이었다.
나는 인터넷에 도는 관련 글 몇 편(양쪽시각 다)하고
신문기사 몇 개 읽어보니까 거의 답이 나오던데
자기가 읽어서 잘 모르는 이야기는 어디다 치워버리고 자기 입맛에 맞는 글만 열심히 퍼나르기하는
불쌍한 중생들이 좀 많아 보였어야 말이지.
덕분에 그렇게 홈페이지 조회수 떨어뜨리려고 애를 썼건만
(달랑 하루긴 했어도) 도메인 바꾸기 전 수준까지 방문자수가 팍 치고 올라가더만.
하마터면 도메인 또 바꿀 뻔 했다.

보아하니 어떤 방문객께서 내 글을 보고 어딘가에 링크를 거신 모양인데
몇 군데나 퍼져나갔는지 모르겠지만 네이버 블로그만 일단 검색해보니 대여섯 개는 되더만.
(물론, 그게 다 일지도)
당연히 “당신의 글을 링크하겠습니다” 이런 류의 의사표현 한 번도 받은 적 없는데
워낙 카피레프트를 표방하는 인간이기에 뭐 그런 것 가지고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앞으로 뭐 링크할 글 있으면 꼭 물어보고 해라,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받은 적 없다, 그거지.
굳이 한 마디 하자면 딴 데 가서는 그러지 마시라. 혼난다.

하여튼 그 글을 쓰고 대충 2주 지났나.
다들 아시다시피 그 2주 사이에 워낙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앞서 말한 이유 말고 내가 홈페이지에 시사성 있는 글을 잘 안쓰는 이유가 또 있다면
가급적 논란이 진행 중인 글은 홈페이지에 잘 안쓰려고 들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 영화평을 3부 다 보고 쓴 거 봐라)
사실관계가 다 까발라져서 해석이 분분한 경우라면야 몰라도
사실관계가 다 까발라지지 않은 경우는 괜히 한 마디 잘못했다가 나중에 뒤통수 크게 맞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 뭐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사실 황우석 교수 건도 별로 홈페이지에 글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2주 전 일요일에 YTN에서 MBC 윤리문제 터뜨리고 MBC가 항복선언(사과방송)하면서
이제 어쩔 수 없이 진정국면에 접어들겠군, 진실게임은 끝났군,
이런 판단하에 글을 썼던 거였다.
MBC가 방송을 못하게 되니까 다른 인터넷언론 움직여서 녹취록 흘리고
여타 사이트(브릭이나 사이엔지)에서 자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날 줄 내가 알았나.
다시 말하지만 그 바람에 2주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뭐 진실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혼자 생각하는 건 있지만 역시 나중에 뒤통수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거고
아주 단순한 이야기 하나만 하자.
도대체 어디서 이 모든 것들이 시작되었는지를.
왜냐하면, 논쟁이 길어지다보면
우리는 종종 우리가 왜 싸우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구선 논쟁을 시작했을 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문제를 가지고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싸우고 있는 거다.

시작은 분명 황우석 교수의 2005년 논문에 관한 것이었다.
(1탄은 난자제공윤리, 2탄은 줄기세포 숫자의 조작이 되겠다)
그런데 지금은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되어있지 않나.
같은 이야기 아니냐고 따져묻는 분 계시다면 모르는 거 티내지 말고 논쟁에서 빠져라.
황우석 교수가 2004년에 체세포복제줄기세포 만들었다고 논문 발표했고
아직 거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시비거는 사람, 없다.
2005년 논문의 조작설을 주장하면서 2004년 논문과 비교해 이러이러한 부분이 달라졌다, 라고 주장한 것도 있으므로
일단 2004년 논문은 열외다. 빠진다.
그렇다면?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 만들었다, 이건 논쟁꺼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걸 갖고 싸우고 있다.

2005년 논문에 ‘인위적 실수'(과학자께서 어휘력도 더럽게 풍부하시다. 이런 말 난생 처음 들어본다)가 있었다고 황우석 교수도 인정했다.
사이언스에 논문 철회 요청하겠다고도 말했더라.
그럼 사실 논란은 거기서 끝난 거다.
근데 지금 대한민국이 온통 황우석 교수가 만든 줄기세포가 있냐 없냐 갖고 싸우고 있는 판국이다.
왜?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를 실제로 11개 만들었었다면,
사이언스에 제출한 논문이 구라가 아니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않느냐, 뭐 이런 식이겠지.
그런데 보자.
대학 다니다가 데모를 했든, 학비가 없었든, 어쨌든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그만둔 학생이 있다고 치자.
그 학생이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대학생 또는 대졸 학력이라고 말하고 다니면 그건 거짓말 아닌가?
어떤 사람은 논문 제출한 후에 논문에 있는대로 11개 채웠으니 문제가 없단다.
(반대편 주장도 아니고 황우석 교수 주장이 이렇다. 줄기세포 11개가 있다고 쓴 논문을 제출한 시점에 줄기세포는 사실 8개밖에 없었단다. 이 말 되게 중요한 건데 지금 이슈도 안되고 있다)
수능 만점 받은 녀석이 서울대 원서도 넣지 않았는데 서울대생이라고 하고 다니면 그건 거짓말 아닌가?
지금 문제의 핵심은 고의로 그랬든 실수로 그랬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황우석 교수가 2005년 논문에 구라데이터를 첨부해서 제출했다는 사실이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11개다 아니다의 문제라는 말이다.
황우석 교수의 항변(나중에 11개 채웠다)을 모두 받아들여도 그건 정상참작 정도의 고려사항이지
황우석 교수가 무죄라는 주장이 될 수는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많이 양보해서 그게 중요하다고 해도 줄기세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서울대에서 조사해줄 거다.
일주일이나 열흘이면 결과 나온단다.
실제로 줄기세포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 아니 보여줘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있네 없네 하는 논쟁에서 좀 빠지자.
줄기세포가 나와도 황우석 교수가 잘했다고 할 수 없고
줄기세포가 안나와도 새삼 더 놀랄 일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이제 정말 끝난 것 같아서 또 이렇게 글을 쓰는데
모르지, 뭐가 또 튀어나와서 제4라운드로 들어갈지는.
하여튼 다이나믹 코리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