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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 포 콜럼바인] 미국이나 한국이나

2003년 11월 15일

이 영화가 코아아트홀에서 개봉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과연 일주일을 넘길 수 있을지가 가장 궁금했었다. 일반 관객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을 다큐멘터리고, 손님 없기로 유명한 코아아트홀이라면… 아무리 반미 분위기 등 주변 여건이 도와준다고 해도, 이 영화가 대박나서 롱런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에, 개봉한 지 얼마 안된 날 행여나 놓칠세라 부리나케 코아아트홀로 달려가야했었다.

대략, 어떤 내용의 영화고 어떤 성향의 감독인지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다 아는 얘기를 그냥 스크린에서 다시 확인하는 수준일 수도 있었다. 아울러 코아아트홀의 그다지 좋지 못한 관람환경(무릎 아프다)과 환한 배경에 자꾸 겹쳐서 보이지 않곤 하는 자막 등등 영화 외적인 불만사항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는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적극 대입시키면 영화 중반쯤에서 나는 상당히 짜증을 내고 있었어야 옳았다.

그런데 중반쯤부터, 내가 막연히, 단순히 생각했던 방향과 다르게 영화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짜증을 내기는커녕 영화에 확실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냥 영화 초반부터 미루어 생각하기로, 마이클 무어가 주장하는 것은 이라크 전쟁 등과 맞물려서 강대국으로서 미국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했었는데, 마이클 무어는 그 문제를 미국의 내부로 끌고 들어갔던 것이다. (물론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폭력성에 대해서도 얘기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의 해답은 안에서 찾는다)

평소에 그냥 생김새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던(음악도 사실 별로…) 마릴린 맨슨과 인터뷰 하는 장면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거침없으면서도 핵심을 정확히 훑어주는 맨슨의 언변이었다. (물론, 자막을 만든 사람의 번역실력이 출중했을 수도 있긴 하다) 특히 그가 했던 발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이 하나 있다.

“TV를 본다거나 뉴스를 볼 때면 온통 무서운 이야기만 나오죠. 홍수, 에이즈, 살인 이야기… 중간에 광고를 넣어도 ‘입냄새 나면 친구가 도망간다’ ‘여드름 많으면 애인 안생긴다’ 전부 다 ‘공포’와 ‘소비’를 연합시키려는 수작들이죠. 사람들한테 두려움을 심어줘서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번다는 말이죠”

알게 모르게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것을 폭력으로 정당화하는 사회. 그것이 마이클 무어가 지적한 미국 사회였다. 여기서의 폭력은 국민들에게 충분히 조성된 불안감에서 기반된 것이므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당연히 “정당방위”라고 생각될테고… 하지만 미국의 이웃나라 캐나다에서 보듯이, 그네들은 문도 안잠그고 그냥 살지 않는가 말이다… 필요 이상으로 겁에 질려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오히려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존재인가 아닌가? 대답은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의 “겁에 질린 사람”에게는 “(나 이외의) 다수의 선량한 사람”이란 존재는 없기 때문에 그 정답이 통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미국만 그런 나라인가? 비슷한 수준의 집단 공포에 시달리는 나라가 하나 더 있지않은가? 다른 나라도 더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가본 적이 없고, 내가 잘 아는 나라는 우리나라, 대한민국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나? 천만에 말씀이로다. 아직도 엄연히 휴전 중인, 전쟁 중인 나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국방에 대한 의식이나 대북경계심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확률”에 대해서 객관적인 논쟁이 된 적은 거의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 특히 시위 열심히 하시는 보수세력들의 고귀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으니 그들의 말에 무슨 논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북한의 지배세력들은 완전히 미친놈들이다” 아 미친놈들 행동에 무슨 논리가 있고 무슨 상식이 통하겠는가. 그런 말을 듣다보면 정말 “주석궁에 탱크를 진주시키자”는 모씨의 말이 훨씬 진정성있게 들린다. 적어도 긴장을 유지시켜서 그것을 빌미로 국민을 위협하며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의도는 없는 발언 아닌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국민들이 갖고있는 불특정한 공포를 외부로 적극 표출시키는 반면에, (그래서 지들끼리 쏴죽이고 다른 나라 공격하고 그러는 거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 공포에 이용당해서 군사정권과 여타 기득권세력들에게 확 틀어잡혀있을 뿐 찍소리도 제대로 못내왔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긴 있다. 그 말을 뒤집어서 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미국인들보다 더 바보라는 말과 하나도 다를 거 없다. 하긴 미국처럼 총기 소유하게 법 고쳐주면 역시 서로 쏴죽이고 북한이건 일본이건 쳐들어가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몇차례의 대통령선거를 통해 군사정권 종식되고 남북정상회담까지 가진 오늘에 와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아직까지는 근거없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미국에 의존하고 북한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민주화건, 경제회복이건, 남녀평등이건, 뭐건간에 우리나라에 널려있는 문제점의 대부분이 그놈의 “근거없는 공포심” 탓인데도 그걸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다. 어쩌겠는가. 그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냅둘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