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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앳더 게이트] 어느밤 빈 극장에서

2001년 7월 11일

배우가 좋아서 보는 영화가 있고, 줄거리가 맘에 들어 보는 영화가 있다. 솔직히 감독이 맘에 들어 보는 영화도 있긴 있지만 앞의 두 경우만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아카데미나 칸느 같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거나 주목받았다는 이유로 보는 영화도 역시 마찬가지고.

<에너미 앳더 게이트>를 내가 본 이유는 어느쪽이냐하면 감독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이 맘에 들어서 본 영화는 아니다. 장 자크 아노라는 감독의 팬도 아니고, 그의 영화 중 <티벳에서의 7년>, <베어>, <불을 찾아서> 같은 경우는 장 자크 아노 특유의 지루함이 두려워 아예 볼 생각도 안했던 작품들이었다. <장미의 이름>은 영화 속의 추리적 요소 때문에 재밌게 본 작품이긴 하지만 (원작이 워낙 지루한 작품이라… 영화가 지루할 틈이 없어보였다) <연인>같은 경우는 제인 마치가 아무리 홀랑 벗고 설쳐댔어도 역시나 지루했었다.

그렇지만 역시 내가 <에너미 앳더 게이트>를 택한 이유는 감독때문일 수밖에 없다. 쥬드 로나 조셉 파인즈, 에드 해리스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며 서부극 스타일의 대결을 즐기지도 않거니와 러시아와 독일의 전투 따위에 관심을 가질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장 자크 아노의 영화이기 때문에 볼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다. 왜 그랬을까? 예전같으면 장 자크 아노라는 이름을 듣고 바로 “보지 않을 영화” 리스트에 올려놨을 것을.

장 자크 아노의 지루함에 대해서는 질겁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가 영화를 못만드는 감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붙으면 아무래도 한번 더 쳐다보게 되고, 그런대로 이 영화가 내 취향에 맞으면 그럼 볼까? 라는 고려를 하게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에너미 앳더 게이트>의 감독이 내가 잘 모르는 이름이거나 영화계에서 추방되어야한다고 여기고 있는 감독이었다면 시놉시스를 보고 흥미를 느꼈다고 한들 극장까지 걸어가서 돈내고 볼 생각은 결단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감독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 영화에 대해선 별 소리도 안하고 왜 이 영화를 봤는지만 한참 주절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영화는 내가 기대한만큼,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그만큼 나를 충족시켜주었던 영화기 때문이다. (이러기도 쉽지 않다) <장미의 이름>이나 <연인>에서 간혹 보이던 그 무덤덤한 카메라워크도 좋았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연상시키는 생동감있는 전쟁의 묘사도 좋았다. (특히 맘에 들었던 장면은 스파이 활동을 하던 꼬마 샤샤가 교수형당한 모습을 실루엣 롱샷으로 잡은 씬이었다) 반면 주인공에 대한 성격묘사는 도식적이고, 어설픈 삼각관계를 집어넣어 극의 흐름을 종종 끊어먹은 점은 별루였다.

하지만 결말 깔끔하고, 특히나 마지막 남녀주인공의 상봉장면에서도 무덤덤한 카메라 워킹을 보여준 점 아주 높이 사고싶고, 쥬드 로와 에드 해리스의 대결장면에서 시종일관 긴장감을 늦춰주지 않았던 연출력 등 전반적으로 칭찬하고 싶은 영화다. 영화 보러간다고 할 때 “그게 무슨 영환데요?”라고 묻던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있게 권했고 보고 온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좋은 얘기 해줬으니까. (재미없다고 말하기 미안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기분나빴던 점을 말하고 끝내야겠다. 이 영화가 주말에 개봉하고 그 다음주 월요일, 그러니까 개봉한 지 3일째 되던 날 명보아트홀의 마지막 프로로 이 영화를 봤는데, 영화 시작할 때까지 극장 안에는 앉아있던 관객은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영화 끝나고 불켜진 다음 나갈 때 보니까 사람들이 좀더 불어나긴 했지만 스무명은 안될 것 같았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기분나쁘고 열받았던 사실은 바로 이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