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대리일기 첫번째

[봉대리의 일기]

11/27 (토) 아침에 눈왔다고 기상청에 우겼음.

오늘부터 일기를 쓰기로 했다.
솔직히 일기 써본지가 너무 오래됐다.
글 쓰는 거 별루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기를 쓰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일기를 쓸 거다.
왜냐고?
오늘 피 부장이 팀원 전체를 집합시켰다.
군대도 아닌데 집합을 걸면 하던 일 중단하고 모여야 된다.
피 부장이 6개월 방위라는 거 다 아는 사실인데…
꼭 방위가 군대 티는 많이 낸다.
괜히 헛기침하고… 커피 한 잔 마시고… 고개를 틀어서 뿌득뿌득 소리를 낸다.
(저 소리 내는 건 한번 배워보고 싶다. 졸라 부럽다)
뭔가 음흉한 생각을 할 때면 피 부장은 개구리 앞에 독사처럼 눈을 묘하게 뜬다.
그럴 때마다 우리들은 곁눈질로 황 대리를 쳐다본다.
역시 우리의 호프 황 대리는 뱀잡아먹는 황소 개구리처럼 볼에 바람을 집어넣어 맞서고 있다.
어쨌든 피 부장이 갑자기 우리를 집합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부터 자기 업무를 정리해서 매일 퇴근시에 자기에게 제출하란다.
업무일지를 쓰라는 거 아녀?
자기가 일 다 시키면서 우리가 뭔 짓 하는지 모르나?
10명밖에 안되는 팀원들 업무를 몰라서 묻는 건 아닐테고.
늘 그렇지만 M자로 벗겨지는 피 부장의 이마를 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시켜야 했다.
(오랜 회사생활로 쌓인 고난도의 테크닉임)
시간대별 업무중요도별로 정리해서 올리라니,
아주 감시단을 붙여주지 그래.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그동안 내가 나의 하루를 뒤돌아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일기를 쓰기로 했다.
업무일지에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을 어딘가에는 퍼부어놓고 싶어서.
업무일지는 월요일부터 쓰란다.
하지만 일기는 토요일부터 쓴다.
내 맘이니까.

[피부장의 일기]

11/27 (토) 날씨는 관심없음

오늘부터 일기를 쓰기로 했다.
아새끼들한테 일기 써라 일기 써라 하도 떠들어대다가 앗싸리 애비가 모범을 보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일기 내용을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애비도 일기를 쓰잖아 씹쑝들아… 이렇게 말을 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맘 먹은 김에 팀원들에게도 일기를 쓰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침부터 집합을 걸었더니 아그들이 쇽쇽 모이는데 참 기분이 좋다.
내 말 한마디에 이리저리 뛰어댕기는 거 보고있자면 내가 대단한 사람 같은 생각이 들어서.
군대를 육방 갔다와서 고참의 기분 같은 거 잘 몰랐었는데
부장이 되고나니까 아마 이런 느낌이지 싶다.
하기사 부장 정도면 대단하지 뭐…
이사님한테 쥐어터질 때면 회의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럴 때면 회의를 소집해서 아그들을 깨면 된다.
회의는 회의로 풀어라.
어쨌든 아그들을 모아놓고 시간을 끌면서 여유를 부렸다.
무슨 말을 들을지 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아그들을 보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고개를 돌리면서 뿌득뿌득 소리를 냈더니 아그들의 눈빛이 존경심으로 빛난다.
짜샤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냐… 타고나야 된다고…
말하기 전에 일단 눈을 가늘게 떠서 아그들을 한번 쌔리는 습관이 있는데
역시 나의 눈빛에 압도당한 황 대리가 당황하여 볼에 바람을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짜식 퉁퉁하게 생겨서 꼭 개구리 같단 말야.
앞으로 업무일지를 써서 매일매일 검사를 맡으라고 했더니
봉대리가 내 이마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저 놈 시키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내 이마를 쳐다본다니까.
저 놈이 쳐다봐서 자꾸 이마가 좌우로 벗겨지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노이로제가 온다.
또 쳐다보면 눈꾸녕을 손가락으로 쑤셔불리라.
하여튼 담주부터 아그들 일기장 검사하는 재미가 하나 늘었다.
빨간 펜으로 체크 팍팍 해주면서 검사해야쥐.

SIDH’s Comment :
처음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제부터 시작하는 일기”라는 당위성을 찾기 위해 <업무일지>에서 소재를 찾았었다.
첫직장이랄 수 있는 백화점에서 맡았던 업무 중 하나가, 각 지방에 흩어져있는 백화점 분점들로부터 업무일지를 받아서 본사버전으로 통합정리해 주간업무보고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업무파악하는데는 큰 도움이 됐지만) 업무를 보고하는 것이 업무가 된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나는 업무보고(결과보고가 아닌 경과보고)는 쓰잘데없는 짓거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윗대가리들이 평소에 서류결제만 착실하게 해도, 아랫것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 서류는 형식적으로 쳐다보고 업무보고시간에 또 보고 받고, 이게 무슨 지랄 옆차기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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