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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Graduation Tears

2004년 3월 21일

흔히들 “꽂힌다”는 말을 요즘 들어 자주 쓰는 것 같다. 대략 이 말의 태생배경을 추적해보면 아마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는 말을 큐피드가 쏜 사랑의 화살이 꽂혔다, 라는 식으로 표현하던 것에서 발전을 시작해서 이제는 엄한 부분에까지 범용되고 있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사용예: “오늘 아침은 커피가 꽂히네” 기타 등등)

글쎄, 뭐 남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나는 내가 쓰는 말에 대해서 (국어사전적으로 어떻게 정의되어있건) 내 나름대로 해석의 범위를 정해놓고 쓰는 걸 즐기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꽂힌다”는 말을 위의 예에서처럼 함부로 쓰는 편은 아니고, 말 그대로 머리나 심장에 뭐가 꽂히는 것처럼 강렬한 느낌을 받았을 때만 저 단어를 쓰고 있다. (뭐, 내가 좀 까다로운 인간이다) 특히 음악을 들을 때 이런 식의 표현을 자주 쓰는데, 왜 음악을 듣다보면 “젖어버리는” 음악이 있는가 하면 “쓸려가버리는” 음악이 있고, “빠져버리는” 음악이 있는가 하면 “스며드는” 음악이 있다는, 뭐 그런 식이다. 간혹 어떤 음악을 듣다가 – 대개 전주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 그 음악이 머리 속을 휙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아주 빠르게 뇌리를 훑고 지나가 아무 것도 못하고 잠깐 멍!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아주 짧기 때문에 멍!하고 느낌표를 붙였다) 그럴 때 내가 “음악에 꽂혔다”는 말을 쓴다고 설명하려고 이렇게 먼 길을 빙빙 돌아온 셈이다.

진추하가 부른 “Graduation Tears”가 바로 나한테 “꽂혔던” 몇 안되는 음악 중 하나다. (참고로 나한테 꽂혔다는 표현이 내게 있어서 최고의 음악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머리가 나빠서 몇년 몇월 몇일인지는 모른다. 많이 바라지마라) 아마도 고등학교 1학년? 그때쯤으로 추측되는데(기억이 아니다. 추측이다) 이문세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그 당시 평범한(?) 음대생이었던 노영심이 출연해서 키보드 반주를 해주는 전화노래방 코너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 어떤 청취자가 전화를 걸어서 “Graduation Tears”를 불렀고, 그때 바로 노영심의 첫 키보드질(?)이 시작되면서 그 전주가 내 머리에 확 꽂혀버렸다는 말이다.

어려서부터 영화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진추하라는 중국여배우가 ‘One Summer Night’이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우리 앞집 살던 태호네 집에 바로 그 진추하의 LP판이 있었던 것도 분명히 아는데, 같은 가수가 부른, 바로 그 LP판에 같이 담겨있는 “Graduation Tears”를 그때서야 처음 들어봤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쩌면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아주 어렸던 때에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게 들었고, 꽂혔고, 그후로는 이 노래를 녹음하려고 온갖 라디오방송을 기를 쓰고 듣다가 마침내 “졸업시즌에” 방송마다 여기저기 틀어대길래 녹음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 녹음해놓고는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면서 가사를 땄던 (고등학교 때는 팝송을 들으면서 가사 따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기억도 나고… 그 가사를 연습장 맨 앞장에 적어놓고 혼자 히죽히죽했던 기억도 물론.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봤더니 진추하의 두 노래, “One Summer Night”과 “Graduation Tears”를 비중있게 들려주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영화 속 고등학생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세대는 아니지만, 그 노래에 얽힌 고삐리 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를 권상우 이정진 한가인이란 배우가 나와서 찍는다더라, 라고 <연예가중계> 같은 프로그램에서 홍보질 발라댈 때는 ‘제목 지어논 꼬라지하고는…’이라면 코웃음만 쳤었는데, 어느날 이 영화가 완성된 후 TV에서 예고편을 방영하는데, 바로 “Graduation Tears”를 백뮤직으로 깔고 나오는 바람에 “꽂혀버렸던” 거다. 평소 별로 이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도 모르고 눈이 높다) 한가인이 그 예고편에서는 되게 이뻐보이더라. (그 약발이 좀 남았는지 요즘은 그냥 봐도 이뻐보인다)

뭐가 그렇게 좋았느냐고…? 글쎄, 그건 설명 못하겠다. 아무튼 그 도입부의 피아노 소리가 그때 왜 내 머리를 두들기는 것처럼 강렬하게 느껴졌었는지, 그러구서 몇 개월을 다시 그 노래를 들어보려고 라디오를 부여잡고 살았는지… 분명한 건, 지금도 그 피아노 전주를 들으면 “꽂히는”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늙으면 그 느낌을 설명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지금은 “꽂혀있다”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