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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시절] 수업시간에 튀기

1997년 12월 20일

1학년때 교양영어시간이었는데, 뭐 번호순대로 나와서 정해진 부분을 읽고 해석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 차례가 됐을 때, 그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 시절의 버릇이 남아있어서 열심히 사전 뒤져가며 해석을 했지만 한 문장이 도통 풀리지 않았다. 결국 끝내 그 문장을 해석하지 못하고 교단 위에 선 나는 불후의 명대사를 교수님과 학우들 앞에서 읊조리고 말았다.
“저에겐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모르면 넘어가자.”
사실 별로 웃을 상황도 아니었는데, 경직된 고등학교 분위기에 익어있던 놈들이 교수님 앞에서 모르면 넘어가겠다는 나의 똥배짱에 감탄을 한 모양으로 그후 두고두고 이 이야기가 회자되었다는 얘기다. (당시 교수님-여자분-의 얼굴을 본 동기 모양의 말에 따르면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불쌍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역시 1학년, 교양국어시간이었는데 교수님이 학생들 모두 좋아하는 시를 한 편씩 선정해서 B4용지에 시와 감상문을 반씩 적어서 제출하라는 숙제를 냈다. 게다가 모든 학우들이 볼 수 있게 복사본을 전 학생들에게 돌리라는 요구도 함께였다. (학교 복사집과 모종의 무엇이 있었던 게 아닐까?) 아무튼 내가 선택한 시는 이상의 ‘오감도’였다. (아해가 막 뛰어가는…) 그런데 우짜다가 교수님이 무작위로 몇명 뽑아서 발표시킨 학우들 중에 내가 포함되고말았다. 내 글투가 보통 이런 식이므로 감상문도 요런 식에서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내 감상문을 들은 학우들은 죄다 뒤집어졌다.
그래도 교수님은 ‘학생 수준을 뛰어넘는 감상문’이니 ”낯설게하기’같은 어려운 용어의 구사’ 등을 들어가며 칭찬을 해주셨는데, 나중에 학점 나온 걸 보니 아마 비꼬아서 한 얘기셨나보다.

2학년 2학기 과목 중에 ‘건축조형’이란 과목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이 과목을 들었나 의심스러운데 아마 친구따라 강남간 수준인 것 같다. 매주 설계과제를 하면서 또 조형과제물까지 만들어야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겠다고 수강신청을 했으니… 어쨌든 첫번째 과제물은 “만남”이란 큰 주제를 가지고 작은 주제를 선정해서 자유롭게 만들어오는 것이었는데 나는 과감하게 ‘정자와 난자의 만남’을 주제로 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에 대해선 별로 길게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내 작품을 수업시간에 들고나가 발표하자 강의실이 난리가 났다. 기왕 삐딱하게 나가 찍혀버렸다고 생각한 나는 몇 주후 자유롭게 이벤트를 선택해서 홍보 포스터를 그려오라는 과제를 받자 당시 한창 떠들썩하던 ‘휴거’를 선택했다. 남들이 이쁘장하게 전시회 포스터 만들어올 때 나는 검붉은 바탕에 사람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그림을 떡 그려갖고 갔으니… 결과는 C+.
그래도 내 후배 누구보단 낫다. 그놈은 교수님이 “면(面)”으로 작품을 구성해오라고 하자 면티로 작품을 만들어왔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