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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씬 – 여성의 한계

2000년 1월 13일

여성 파일럿 에마 씬. 티탄즈의 일원으로 처음 건담 MK-II의 정규 파일럿으로 배속받았고, 카미유와 샤아가 펼친 건담 탈취작전에 동조하여 에우고의 일원이 되었다. 그녀를 에우고로 끌어들인 것은 민간인의 어머니이며 연방군인이기도 한 힐다 비단(카미유의 어머니)을 서슴없이 인질로 내세우는 티탄즈의 잔혹함에 흔들린 탓일지도 모르고, 경직된 티탄즈보다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해 에우고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녀는 전작인 <기동전사 건담>에서 세일러 마스와 비교되는 역할을 <기동전사 Z건담>에서 훌륭하게 해냈다.

원래 시리즈란, 1편의 인기를 먹고 살게 마련인 법이다. 그 인기를 그대로 끌고 가자면 원작과 최대한 비슷한 플롯을 초반부터 보여주는 것이 최고다. <기동전사 건담>의 오프닝에서 몰래 콜로니로 잠입하던 자쿠 3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실제로 침투한 것은 2대이지만), <기동전사 Z건담>의 오프닝에서 몰래 콜로니로 잠입하는 릭 디아스 3대의 모습을 보여주어 시청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 간단한 예가 될 수 있다. 그 콜로니 안의 상황이 많이 다르기는 했지만, 아무로가 일으켜세우는 건담이나 카미유가 일으켜세우는 건담 MK-II나 다 그렇게 비슷비슷하게 연결이 되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기동전사 건담>에서 화이트 베이스의 유일한 여성 전투 파일럿이지만 원래 지온 출신이고 샤아의 여동생인 세일러 마스는, <기동전사 Z건담>에서 에우고의 에이스급 여성 파일럿이지만 원래 티탄즈 출신인 에마 씬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세일러 마스의 경우는 극 초반엔 그저 오퍼레이터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란바랄과 싸우는 도중 난데없이 건담을 무단으로 몰고 나갔고, 그 후에는 그것도 경험이라고 아무로가 없는 사이 간간이 건담을 조종하곤 하였다. 그 덕분에 건담의 파워업메카인 G파이터의 파일럿으로 발탁되었고,(극장판에서는 코아부스터) 비록 마틸다가 전사할 때는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파일럿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어딘가 구색맞추기 정도에 불과한 세일러에 비해 에마 씬의 활약은 눈부시다. 티탄즈에서 간판으로 내세웠던 모빌슈트 건담 MK-II의 정규 파일럿으로 선택될만큼 엘리트 부대인 티탄즈 내에서도 이미 손꼽히는 파일럿이었고, 에우고가 건담 MK-II를 탈취하여 카미유가 조종하게 되자 잠시 릭 디아스를 조종했지만 제작진은 그녀가 릭 디아스의 파일럿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카미유가 건담 MK-II를 본격적으로 조종하며 지구에서 활약할 때는 우주에 남아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카미유가 우주로 돌아오자마자 Z건담이 나타나면서 그녀는 건담 MK-II의 파일럿으로 되돌아왔고, 변형된 슈퍼건담의 파일럿으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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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전투에 미숙한 카미유를 상냥하면서도 엄하게 다그치는 모습도,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전투에 임하는 베테랑 파일럿의 모습도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 건담 제작진은 그녀를 그저 에우고의 베테랑 파일럿에 카미유의 보조적 역할 정도로 위치시켰을 뿐, 그녀를 중심으로 한 어떤 갈등구조도 엮어주지 않았다. 양념처럼 집어넣은 헨켄과의 어긋나는 로맨스는 빼도록 하자. 그녀는 전투에 성실하게 임하는 훌륭한 군인일 뿐,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그 개성이 그다지 살아있지 않다. 당연히 돌출행동도 없고, 정석대로 움직이기만 할 따름이다.

만약 에마 씬이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건담 MK-II는 전반부(21회까지) <기동전사 Z건담>의 스토리를 이끌어온 주인공 메카닉이다. 그런 메카닉을 카미유의 뒤를 이어 조종하는 파일럿이라면 스토리 속에서 적어도 ‘에우고 내 2인자’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물론 건담 MK-II가 에우고 내에서 2번째로 성능이 뛰어난 기체는 아니다. 스토리상 분위기가 그렇게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스토리 내에서 상당히 비중있는 주연급 조연이 되는 셈인데, 그런 남자가 독특한 개성과 탁월한 조종술, 심각한 갈등구조를 이끌고 있다면 당연히 주인공 캐릭터인 카미유의 비중이 죽어버린다. 이것은 화이트베이스와 아가마, 라카이람의 함장 브라이트 노아가 늘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명색이 건담의 파일럿인데, 그렇게 밋밋한 성격은 건담이라는 네임밸류에도 치명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샤아 아즈나블이라면 위의 요건을 대충 충족해주는 편이지만 샤아에게 건담 MK-II를 넘기기엔 ‘2인자’라는 꼬리표도, ‘지온의 용사가 건담의 파일럿’이라는 이질감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라면 상황이 다르다. 아무리 밋밋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극중 갈등도 없다지만 ‘에우고 내 2인자가 여자’라는 설정 자체가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개성이 있건없건은 중요하지 않다. 여자의 몸으로 베테랑 파일럿이면서 모빌슈트대를 지휘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존재가치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때까지만 해도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여성 파일럿이 갖는 위치적 한계였다. <건담 0080 – 주머니 속의 전쟁>에 등장한 크리스티나는 조금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어차피 <0080>의 주인공은 꼬마 알과 자쿠의 조종사 버니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