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 이런 스토리를 기다렸다

최근에 배운 말 중에 클리셰(cliche)라는 것이 있다. 원래는 인쇄에 사용하는 연판,이라는 뜻이라는데, 판에 박은 듯한 문구나 표현을 일컫는 문학용어란다. 예를 들면(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참고), 시원한 산들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로 속삭인다느니, 시냇물이 즐겁게 소리내며 흐른다느니, 뭐 그런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쓰는 사람은 그게 되게 멋진 표현인줄 아는)들을 말하는가 보다.

문학 쪽에는 소질이 없으니 자세한 건 관심 밖이고, 영화계에서 흔히 말하는 클리셰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겠다. 영화라는 게 워낙 종합예술이다보니 문학용어인 클리셰도 영화계에서 쓰이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다보면, 뻔히 그렇게 될 것이 눈에 보이는 뭐 그런 상황이나 장면들 있지 않나. 들은 이야기 중에 괜찮다 싶은 것이 있어 하나 인용을 하자면, 한국 드라마에서 누가 시장을 갔다올 때는 항상 “대파”를 사서 장바구니에 넣어 온다. 그러니까 좀 크고 눈에 확 띄는, 그러면서 무게감은 좀 덜한 물건을 손에 쥐어줌으로써 “시장에 다녀왔다”는 설명을 간단하게 해버리는 셈이다. 이게 외국으로 넘어가면, 바게뜨 빵으로 변신하는 것이고. 하여튼 뭐 그런 것들이다. 좋게 해석하자면 상투적인 묘사를 사용함으로 해서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는 상황을 간단하게 보여준다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뭐야 또 저런 식으로 넘어가는 거야, 이런 불평불만을 낳을 소지가 다분한 것이 바로 이 클리셰라는 것이라 하겠다.

엄밀히 말하면 클리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내가 영화를 보면서 오랜 세월 “불편하게” 느껴왔던 부분이 하나 있다. 천성적으로 영화 내용에 깊게 몰입을 하지 못하는 내 탓일지도 모르겠는데, 특히 록키나 챔프, 그 비슷한 기타 등등 막판에 승부를 가리면서 주인공의 성공과 좌절을 그려보려는 내용인 영화 같은 경우에는 관객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주인공이 마지막 승부에서 멋지게 이기기를 바라며 응원해야만하는 그 상황이, 이상하게 나한테는 영 불편하게 느껴졌던 거다. (성격이 이상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주인공이 “당연히” 이기면 아, 이거 또 진부한 해피엔딩이구만 하고 실망하고, 원래 승부에서는 졌다가 어떤 다른 계기(상대방의 반칙… 뭐 그런 종류)로 다시 이기는 스토리라면 아, 이건 막판 감동을 위해서 너무 스토리를 꼬아대는 걸… 하며 불평하고, 끽해야 최선을 다했지만 아쉽게 패하는 정도…의 스토리라면 음, 이건 그래도 좀 현실적이구만 하는 그런 심보로 영화를 보곤 했던 거다.

물론 나같은 별종 관객을 위해서 주인공이 시작부터 끝까지 적에게 아쌀하게 얻어터지기만 하는 영화를 만들어줄 영화제작사는 별로 없을 거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사람들은 왜들 그리 영화 속 가짜 인생들에 감정이입을 잘도 하는지, 또 인생들이 얼마나 처참들 하시길래 그런 가짜 인생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려고 난리들이신지, 주인공이 주인공이라기도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계속 좌절하고 실패하는, 비참하고 슬픈 내용의 영화가 만약 떡하니 개봉을 한다면 그 영화 절대 안 볼 거라는 말이다. 그나마 영화 좀 보셨다는 먹물 좀 든 평론가 양반들로부터 좋게 들어줄만한 얘기가 “작품성은 좋지만 흥행은 좀 어려울듯” 정도의 멘트겠지.

그러던 어느날, <주먹이 운다>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드디어 내 오랜 소원(?)을 풀어줄 영화 한 편이 세상에 나오는구나 하고 울며 감격했었드랬다. (과장법) 약간의 옴니버스 스타일로 서로 다른 두 권투선수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다가 막판에 둘을 쾅! 충돌시켜버리는 이야기. 사람마다 조금씩 감정이입이 달라 어느 한 쪽을 조금 더 편들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대충 서로서로 잘되는 방향으로 영화가 끝나기를 바라고 있을 때쯤 두 명을 결승전에서 붙여버림으로 인해 관객들의 기대감을 완전히 쌩까버리는 저 감독의 뻔뻔한 연출. 그게 너무 마음에 들어버렸다. 두 명 다 무진장 힘들고 불쌍한 시절을 거쳐 드디어 마지막, 고지가 눈 앞에 있는 거기까지 왔는데, 다른 한 명에 의해 나머지 한 명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확 꺾여버려야 하는 그 생존경쟁의 처절함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겠냐 말이다. 누가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그 상황 자체가 대박감이라고 느꼈던 거다.

결국, 오지게 서로 얻어터진 결과 한 명은 이기고 한 명은 지는 승부가 나버렸다. (무승부 뭐 이딴 식으로 어정쩡하게 결말냈으면 극장 폭파시켜버릴라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아쉬웠던 점은 승부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사람 다 웃으면서 영화가 마무리되었다는 점. 감독이 어느 한 쪽을 너무 비참하게 그려버리는 것에 대해 좀 부담을 느낀 탓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우리 까놓고 얘기해보자. 신인왕전 우승한 놈이 좋아서 웃는 것하고 아깝게 진 놈이 여기까지밖에 안되네 하고 허탈해서 웃는 것하고 같을 수가 있는지. (좋게좋게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우리 선량한 관객들은 패배한 쪽의 웃음을 “최선을 다했으니까 후회는 없다” 정도로 해석하고, 뭐 이번엔 졌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따위의 의미를 넣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웃기지마라. 진 건 진 거다) 그렇게 어정쩡하고 유하게 상황을 마무리짓는 것보다, 내가 감독이었으면 썅 이긴 놈은 막 스포트라이트 받으면서 짱짱하게 막 내리고 진 놈은 열라 비참하게 링을 내려오면서 그 승부의 단면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끝내버렸을 거다. 물론, 어디서 사지도 않은 로또라도 맞지 않는 이상 내가 메가폰을 잡을 일은 없을테니 그런 극악무도한 영화가 관객들 앞에 선보일 일은 없겠지만. 하여튼 그런 부분이나마 조금 아쉬웠을 뿐, 전체적으로는 오랜 세월 내가 기다렸던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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