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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환상의 커플>

2006년 12월 5일

어디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닐지도 모르고)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남녀가 찐하게 사랑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정의의 사도가 악당들을 마구마구 물리치는 이야기도 아니고, 밑바닥 인생이 피눈물나는 노력을 거듭해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성공 이야기도 아니다. 아닌데, 때로는 앞서 말한 모든 이야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뭔가 다른 이야기”니까.

어렸을 때는, 이 세상에 널려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다 재미있어서 닥치는대로 읽어대는 독서광 비스무레한 아이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이것저것 읽다보니 이야기들이 대충대충 비슷비슷한 것 같아 한동안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과 뭐가 다른가, 를 정밀하게 따지느라고 신경이 곤두서있던 시절도 있었고. 결국 지금은 나이 쳐먹고 더이상 신경을 곤두세울 힘도 떨어져 “아, 뭐, 대충 다 비슷하네” 식으로 넘겨버릴 뿐, 뭔가 새로운 이야기 자체에 대한 흥미도 많이 떨어져버려 책이건 영화건 드라마건 심히 필 꽂혀 즐겨찾지도 않는 상태.

이렇다보니 영화를 보건, 드라마를 보건, 만화영화를 보건, 선뜻 눈길/손길이 가는 작품들은 아예 내가 워낙 익히 잘 알고 있는 기존 작품이거나 시놉시스만 봤을 때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감이 드는 작품들뿐이다. 역시 어디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나는 시놉시스를 전혀 모르는/사전정보가 전혀 없는 작품은 절대 보지 않는다. 꼭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영화건 드라마건 새로 개봉/방영되는 작품들의 시놉시스는 굳이 다 찾아서 읽어보는 내 버릇은 그런 습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렇게 뒤져보고나서 이거 재미있겠다 없겠다를 대학교 2학년 때 학회실 날적이에 끄적이던 짓을, 무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 내가 관심을 가진 이유는 오로지 이것이었다. 시놉시스를 봤더니, 이야기가 뭔가 달라보여서.

보통의 신데렐라 이야기 & 기억상실증 이야기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변형되고 발전되어왔지만, 이 시큰둥한 인간의 눈에는 그냥 다 비슷한 이야기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환상의 커플>은 그 신데렐라 이야기를 뒤집고, 다시 기억상실증 이야기를 뒤집어, 모든 걸 다 가진 부잣집 마나님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가난한 남자의 집에 얹혀사는 이야기를 만들어 버린 거다. 야 이건 새롭네, 싶었던 거지. (이런 스토리의 원작으로 헐리웃 영화가 있다는 말도 기사에서 미리 읽었지만, 뭐 안본 영화니까) 한예슬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여우 같은 얼굴에 비쩍 마른 몸매의 소유자다) 오지호를 좋아했을리는 당근 없으며, 박한별 안티만큼 싫어한 건 아니지만 짝퉁 전지현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별로별로였고, 무엇보다도 나름 스타작가시라는 홍자매 작가의 전작, <쾌걸 춘향> <마이걸>을 모두 보지 않은 탓에 (뭔 드라만들 봤겠냐마는) 걔네들이 뭐해먹는 작가들인지도 모르고, 오로지 그 뭔가 새로울 것 같은 느낌 때문에 <환상의 커플>을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드라마 초반(1~2회) 나름 광고 패러디도 하고 오바액션도 하고 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긴 했지만, 여태껏 지긋지긋하게 보아온 시트콤식 전개로군, 하며 쓴 웃음을 지을 뿐 그렇게 몰입하지는 않았었다. 오, 이건 확실히 뭔가 다른데, 라고 생각하면서 제대로 드라마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은, 본격적으로 안나 조가 나상실이 되면서, 그러니까 내가 기대했던 바로 그 새로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부터였다. (아, 혹자들은 나와 비슷한 정신세계의 “강자”가 본격적으로 극 전면에 나오면서부터 참을 수 없는 동질감에 드라마에 빠져든 것이 아니냐는 모함을 하기도 한다) 자질구레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나에게 있어서 <환상의 커플> 최고의 장면은 나상실이 짜장면을 꾸역꾸역 먹어치우는 장면인 이유도, 바로 그 장면이 귀부인 안나 조와 빈털털이 나상실을 가장 극명하게 대비시켜주는 장면이었으니까. (이후로 막걸리 같은 유사소재들이 줄줄이 더 나오지만, 짜장면이 가장 처음이었기 때문에 임팩트가 가장 강하지 않았나 싶다)

전형적인 드라마 스토리인 신데렐라 & 기억상실증을 뒤집어놓았지만, <환상의 커플>은 보통의 드라마 – 그것도 성공적인 드라마 – 가 가져야할 요소들도 놓치지 않았다. 안나 조가 좋던 싫던,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나상실로서의 삶에 익숙해져갈수록, 시청자들은 안나 조가 기억을 되찾은 이후를 걱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아예 나상실로 눌러앉기를 희망한 시청자들 꽤 있었을 거다) 이것은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성장과정(신체적 성장만을 말하는 거 아니다)을 지켜보며 시청자들이 같이 몰입하고 감정이입해가는 것을 제대로 가져온 경우이다. 다만 여기서도 작가들의 역발상이 하나 돋보이는데(물론 원작이 있으니 홍자매 작가들만의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의 성장드라마들은 우리 곁에 흔히 있는 듯한 사람을 보여주면서 (또는 우리보다 좀 못한 사람) 그 사람이 이런저런 역경을 겪으면서 우리보다 뭔가 한 차원 위에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반해, <환상의 커플>에서는 처음에는 우리와 뭔가 동떨어져보이는 부잣집 마나님을 보여주고, 그 사람이 이런저런 역경(말그대로 역경이지)을 겪으면서 우리 곁으로 점점 다가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역(逆)성장과정을 그리면서 시청자들에게 더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그래, 우리 같은 사람도 저렇게 될 수 있어”라는 대리만족 대신, “그래, 저런 대단한 사람도 사실 우리랑 별로 다르지 않아”라는 조금은 자기위안을 공감대의 포인트로 잡은 셈이다.

이런 이야기 잘못 전개시키면 사상적으로 확대될 수 있으니 대충 그 정도로 접고, 그런 맥락에서 드라마를 지켜보면 결론적으로 안나 조가 나상실로의 삶을 택하는 느낌을 더 강하게 풍기면서 끝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장철수와 안나조/나상실의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의 복장으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대화로 보나 안나 조의 삶보다는 나상실의 삶에 가까와보인다) 솔직히 속물적인 인간들이 은근히 궁금했을 이야기, 나상실의 그 수많은 재산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 재산들이 앞으로의 장철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장철수 돈 좋아한다는 거, 그거 드라마 내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거다) 그런 이야기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상실이 자신의 재산을 다 버리고 장철수를 택한 것도 아닐텐데 (정황적으로 말이 안된다) 굳이 그런 시츄에이션으로 드라마의 결말을 잡은 것은, 안나조의 역성장에 드라마의 키워드가 맞춰져있었기 때문에, 귀부인 안나조의 모습보다 소박해진 나상실의 모습이 더 드라마의 결말에 어울렸기 때문에, 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주인공의 역성장에 대한 시청자들의 자조적 공감대라. 여태껏 잘 보다가 마지막 회에 대한 시청자들의 의견이 갑자기 갈려버린 것은 그 공감대에 대한 이해부족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판단 보류다. 그런 공감대 자체에 대한 판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