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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례이야기] 삼례의 비밀

1998년 2월 1일

이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들은 이야기다. 내가 입대하기 전인지 휴가 나갔을 때인지는 잘 모르겠다. 삼례는 내무반에서도 이상하게 양말이나 속옷같은 것을 잘 훔치는 놈으로 찍혀있었는데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그러고 물증을 잡은 적도 없어서 그저 설(設)로만 남겨둔다) 하긴 책도 훔치는 놈이 뭘 손을 못대겠는가. 그런데 고참 병장들 중에는 빨래하기 귀찮으니까 담가두는 세제를 사서 빨래를 그냥 담가두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이것을 무척 부러워한 삼례는 몰래 고참 관물함을 뒤져서 세제를 꺼내 자기 빨래도 담가두는 짓을 저지르곤 했는데, 고참들이 좋게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면 자기는 절대 훔쳐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럼 세제는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인가.
참다못한 고참은 세제 통을 바꾸고 세제를 담아두었던 통에 시멘트를 넣어놓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삼례는 일부러 고참이 자리를 비운 틈에 관물함을 뒤져 세제를(정확히 말하자면 시멘트를) 물에 타서 빨래를 담아 세면장에 갖다 두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수습이 되었는지는 삼례만이 알고 있다.

그 인물에 – 하긴 더 못생긴 인간도 연애하고 장가도 가더라만 – 애인도 있었는지 (자기는 약혼녀라고 주장하지만) 삼례에게도 가끔 편지가 오곤 했다. 그런데 애인이라고 할 수준은 아닌게 분명하다(정말 애인이라면 편지가 그렇게 뜸할 수 없다.) 하루는 애인 생일이라고 기타랑 카세트랑 가지고 내무반 구석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대는게 아닌가. 뭐 녹음해서 선물로 준다나. 시끄럽다는 이유로 고참들로부터 주먹이 몇 번 오가고 삼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나마 녹음을 완성했다. 노래는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뭐냐고 안 물어봤다. 물어봤으면 자기가 작곡했다고 할 게 뻔하니까. 나중에 그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편지를 보냈는데 뭐 놀랐다는 둥, 고맙다는 둥 그런 상투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편지가 다신 안왔지 아마.

거듭 말하지만 삼례에게 컴플렉스 비슷한게 있다면 비밀을 취급하는 사무실에서 나만 비밀을 공식적으로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좀 기분나쁘게 말하면 나는 행정병 삼례는 타자수) 그래서 그런지 삼례는 일부러 비밀 문서도 자기가 시시콜콜 참견을 했고 (공식적으로 못 만지지 비공식적으로는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까) 내무반에서도 자기는 전혀 모르는 보안 관련 문제를 무진장 진지하게 (나는 속으로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떠벌이곤 했다. 한번은 공군본부에서 보안감사를 나왔는데, 삼례는 감사원들이 관물함을 뒤져서 카세트 테이프가 나와도 다 가져간다고 공갈을 하기 시작했다. 뭐 카세트에다가 군사기밀을 녹음해서 외부로 유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나.(와 정말 말되는 거 같다. 턱도 없는 소리지만) 덕분에 내무반 사람들은 천정을 뚫어서 카세트 테이프를 몽땅 숨겨놓는 웃기지도 않는 짓을 저질렀고… 나는 모든 것을 알고있지만 조용히 구경만 했고…(그러고보면 나도 참 나쁜 놈이다)

언젠가 한번 내가 놀러나갔던가 해서 내무반을 비운 적이 있었다. 원래 계획계하고 행정계 사람들은 비상시에 대비해 내무반을 비우면 안되는데 그때 삼례가 당직이었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내무반을 비웠던 것이다. 그런데 내무반에 들어와보니 내 관물함 문이 워카발로 채여서 박살이 나있는게 아닌가. 내무반에서 워카를 신고 있는 사람은 당직근무자 밖에 없다. 아니나다를까 졸병들 증언에 따르면 내 관물함 문을 열려던 삼례가 워카발로 문을 박살내버렸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삼례는 끝까지 자기가 그랬다는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고 애들말에 따르면 창고 열쇠를 찾느라 그랬다는데 창고 열쇠는 사무실에 있다. 자기 사무실 열쇠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관물함을 부수냐?

우리 대대는 크리스마스때마다 말하자면 “학예회”와 비슷한 행사를 한다. 이거 준비를 하느라고 9월쯤부터 고참들은 쫄병들을 닦달하고 쫄병들도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먼저 애인과 사진을 찍어와야하고, (아는 사람은 안다. 내가 이거땜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전시할 작품을 만들어야하며, (건축과 출신이 많은 시설대라 그런지 건축 모델을 많이 만든다) 내무반 별로 연극을 준비해야한다. 내가 입대하기 전 해에 크리스마스 때는 삼례가 졸병이었으므로 작품이랍시고 하나 만들었는데, 어디서 골판지 상자 쪼가리 뜯어다가 (내가 이런 말할 자격이 있나… 나도 이듬해 상자 쪼가리 뜯어서 만들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3등 했음) 활주로 랍시고 만들어왔는데 얼마나 조잡하고 치졸하게 만들었는지 전시 하루만에 모 병장이 뽀개서 쓰레기통에 쳐넣어버렸다고 한다. 전시 중인 작품을 뽀개버린 예는 내가 듣기로 전무후무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