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시로코 – 뭔가 부족한 안티히어로

2002년 7월 27일

<기동전사 제타건담>에서 최고의 안티히어로는 누구인가? 이런 쓰잘데기 없는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왜 쓰잘데기 없다고 지레 눙치고 들어가냐하면, 다른 여타 로봇애니메이션에서 “안티히어로가 누구인지”를 고민할 이유가 별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질문을 던졌으니 자문자답이라도 해보겠다. 내가 생각하는 <제타건담>의 최고 안티히어로는 “펩티머스 시로코”이다. “에이~ 나두 그렇게 생각하구 있었어~”라고 쉽게 한마디 던져주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대는 “하만 칸”이란 이름을 그리 쉽게 넘겨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저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사흘밤낮을 머리 쥐어싸매고 고민했던 내가 너무 비참해진다… 거짓말이다)

어찌 보면 사실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카미유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는 상대는 하만이 아닌 시로코다. 카미유를 정신공황의 상태에 몰아넣은 것도 시로코이고, <제타건담> 에피소드 처음부터 에우고의 최강적은 티탄즈였음을 감안하면 이넘저넘 다 죽여버리고 자신이 티탄즈의 실권을 쥔 시로코가 역시 안티히어로로서도 제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만 칸의 이름을 조용히 던져본 이유는 <제타건담> 후반부에서 하만 칸의 카리스마가 너무나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몰라도, 지금껏 하만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은 건담팬들은 보았어도 시로코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은 건담팬은 쉽게 보지 못했다. 이미 인기도(?)라는 측면에서 시로코는 하만에게 눌리고 있는 것이다. 야~ 쥔공의 정신세계를 파괴시켜버릴 정도로 완벽한 뉴타입이었던 시로코가 도대체 왜 하만에게 밀리는 것인가?

그래 좋다. 왜 시로코가 하만 칸에 밀리는지를 비교해서 한번 따져보기로 하자.

첫째, 액시즈는 하만 칸이다. 아주 단순한 이분법이 적용된다. 미네바는 꼭둑각시고, 나머지는 이름조차 없다. 하지만 티탄즈는…? 솔직히 티탄즈라는 이름에서 연상되어 떠오르는 것은 바스크나 제리드 같은 이름이다. 시로코보단 차라리 쟈미토프나 자마이칸이 더 티탄즈에 어울린다. 게다가 시로코는 티탄즈의 상징과도 같은 검은색 제복조차 입지 않는다. 분명 에우고의 반대말(?)은 티탄즈인데, 그 티탄즈와 시로코가 그다지 연관되어 연상되지 않는다는 것은 “안티히어로”로서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다. 우리가 지금껏 보아왔던 슈퍼로봇물에서, 악당이 어딘가 목적이 있는 집단에 속해있고 주인공이 홀로 고독하게 싸우는 모습은 숱하게 나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반대다. 주인공은 목적집단에 속해있고 악당이 지 혼자 까분다… 쉽게 말해서, <제타건담>에서 시로코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말이다.

둘째, 시로코에게는 뽀다구나는 모빌슈트가 없다. 하만 칸은 솔직히 이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미려한 곡선에 개성만빵인 흰색 모빌슈트 큐베레이를 타고 등장한다. 그럼 시로코는? 처음 시로코가 타고 나타난 모빌아마는 “제타건담에 등장하는 첫가변모빌아마” 메사라였다. 30m 가까운 덩치에 부스터만 큼지막한… 그리고 퍼스트건담 시절부터 모빌아마는 그다지 뽀다구가 나기 힘들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사라는 지오에 비하면 양반도 그런 양반이 없다. 먹다남은 식빵부스러기 뭉쳐놓은듯한 지오의 외관은, 아무리 설정집에서 최강의 모빌슈트 운운해도 미동도 하지 않을만큼 “한심하게” 생겨먹었다. 인간은 스마트하게 잘 빠져먹었으면서 만들어놓는 모빌슈트 생김새하고는… (아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메사라, 파라스아테네까지는 몰라도 샤만, 지오는 영 아니다) 어쨌든 하만의 인기와 큐베레이의 인기가 병행하고, 샤아의 인기가 붉은자쿠에서 어느 정도 비롯되었다고 본다면, 시로코의 한심스러운 모빌슈트들은 그의 카리스마를 무척 많이 갉아먹었다는게 내 생각이다.

또 있다. 셋째, 퍼스트의 안티히어로 샤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만도 두 작품에 연이어 출연(?)한다. <건담더블제타>에선 뭐 말할 필요도 없는 주역 안티히어로 아닌가… 하지만, 시로코는 솔직히 <제타건담>에서도 안티히어로의 비중을 여러 사람에게 갉아먹히더니 그냥 <제타건담>으로 쫑이다. 이것은 단지 등장한다, 즉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다른 건담시리즈와의 연관관계를 생각해봐도 앞에서도 뒤에서도 시로코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하만 칸의 경우, 단순히 제타와 더블제타에 연달아 출연하는 이외에도 1년전쟁 당시 후라나간기관에서 키우는 비밀병기(?)였다는 둥, 샤아와 뭔가 썸씽이 있었다는 둥 그런 설정이 줄을 잇고 있다. 또 <0083 스타더스트메모리>의 아나벨 가토 같은 경우 “1년전쟁 당시의 전쟁영웅, 솔로몬의 악몽”이라는 설명을 붙여 퍼스트와 연관을 짓고 있다는 점을 볼 때, 1년전쟁이나 지온군과는 전혀 무관한, 난데없이 목성에서 날아온 시로코에게 건담의 세계관에 매료된 매니아들이 감정이입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로코가 기렌의 숨겨놓은 자식이다! 뭐 이런 설정이 튀어나오면 팬의 입장에서 황당할지는 몰라도 앞으로 시로코에 대한 각종 연구자료? 뭐 그딴 것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확실한 계기가 될 거라는 말이다)

이상은 쉽게, 하만 칸과 비교하여 시로코가 어떤 면이 부족했는가를 그냥 살펴본 내용이다. 하지만 그외에도 시로코가 메인안티히어로로서 부족한 면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것은 시로코가 극중에서 남성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한번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와 손을 잡았던 남자들은 거의 그를 경계하거나 이용하려 들었고, 그가 가까이한 여자들은 거의가 (마우아만 예외인가…?) 시로코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었다. 시로코의 이상이 뭐 여성이 어쩌구 하는 것이니까 그렇다, 라는 건 설정상의 말이고, 현실적으로 남자들은 남자한테 빌빌대고 여자한테나 호통치는 사람을 기회주의적인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시로코의 카리스마를 가장 많이 깎아먹은 것은, 극중 내내 시로코가 카사노바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