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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뉴타입 (1)

2001년 6월 23일

많은 수의 건담 매니아들, 특히 퍼스트 건담부터 1년전쟁의 세계관에 매료된 사람들에게 “뉴타입”이란 단어는 건담보다 더 상위의 개념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건담 세계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는 단어가 바로 “뉴타입”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뉴타입”을 이해하지 못하면 건담을 이해하기에 치명적일 정도이고, “뉴타입”을 무시하면 건담의 줄거리를 반도 따라가기 힘들다. 뉴타입의, 뉴타입에 의한, 뉴타입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바로 건담이기 때문이다.(뭐 적절하지 못한 비유 같긴 하지만, <건담>이란 잡지는 없어도 <뉴타입>이란 잡지는 있다 ^^;)

물론 여기저기 지겹게 널려있는 뉴타입론에 싫증을 내고 정통밀리터리물로 건담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저런 복잡한 것 다 생략하고 반다이사의 화려한 건프라에 열광하는 팬도 있겠지만, 어쨌거나저쨌거나 건담에서 뉴타입은 건담 인기의 한 근간이었음을 적극 감안하면 뉴타입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뉴타입… 막상 뭔가 말을 하려니 뉴타입론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 방대해서 한숨에 하고싶은 말을 마무리짓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일단 시작부터 2부로 나눠놓았다. 첫대목에서는 건담 스텝이 뉴타입이라는 개념을 스토리에 엮어넣었어야만 하는 이유를 스토리 외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 다음 대목에서는 스토리 내부적으로 뉴타입이 연방과 지온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계획이다.

그럼 가보자! 먼저 뉴타입을 정의해볼까? 공교롭게도 아직 “뉴타입”을 명쾌하게 정의내린 문구를 본 적이 없긴 한데, 건담 팬 중에서 뉴타입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으리라는 생각에 일단 나의 정의를 내려보겠다. “뉴타입이란 우주로 나온 인류가 한단계 진화한 모습으로, 고도의 직감력과 상황 인식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시간과 공간을 지배할 수 있는 단계를 지향하는 존재를 말한다”

여기까진 좋다. 그렇다면 왜 굳이 작중에 “뉴타입”이란 설정이 필요했는지를 짚어보자. 나는 어떤 면에서 뉴타입의 설정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일련의 슈퍼로봇물에서는 주역 캐릭터가 주역 메카닉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뭔가 선택받은 존재라는 설정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래도 명색이 주인공인데 지구를 지키는 용사가 평범한 사람이어서 누구나 그 로봇만 타면 지구를 지킬 수 있다고 하면 좀 시시해지지 않겠는가. 또한 대개 나이 어린 소년으로 설정되는 주인공들이 당당하게 어른들과 맞서 싸우는 것에 대한 약간의 타당성 부여의 의미도 있을 것이고. 흔한 경우 주인공들은 로봇을 만든 사람의 아들 또는 가까운 인척, 또는 고아였지만 양자로 들어오는 식으로 어떻게는 로봇과 관련을 맺은 상태에서 어려서부터 조종에 대한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거나, 외계에서 날아온 어느 별의 왕자거나, 타고난 초능력자여서 조종사로 발탁되었거나 그런 식이었다. “뉴타입”도 앞서 말한 예 중에서 “초능력자”에 대한 변형에 불과하다고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동전사 건담>에서 뉴타입은 극 초반부터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건담의 첫화를 보면, 아무런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갑자기 건담을 타고 적들과 싸워야하는 주인공 아무로를 외계의 왕자로 설정할 수도 없었고,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기도 골치아팠다. 건담 만들기 바빴을 아버지가 졸라리 훈련시켰다는 설정도 그렇다. 초능력자…라는 설정이 제일 만만했겠지만, 토미노 요시유키는 좀더 “리얼한” 설정을 택했다. “건담의 성능이 졸라 좋다”는 것으로.

여기까진 괜찮았다. “연방의 모빌슈트가 괴물이었기 때문에” 풋내기 조종사 – 비록 기계를 다루는데 능력이 뛰어났다지만 – 를 태우고도 건담은 가공할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온 역시 이미 앞서있었던 기술력을 바탕으로 신형 모빌슈트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면서, 점점 건담이 갖고 있던 “기체의 우월성”이 상쇄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로도 조종사로서 그만큼 성장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일련의 만화에서 흔한 설정 중의 하나다.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점점 강해지는 적, 그만큼 업그레이드되어가는 주인공의 전투력.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등을 떠올리면 쉽다) 일반적인 슈퍼로봇물도 이런 전철을 밟아왔고, 이런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부분 “신형 메카”였다. (마징가 제트나 그랜다이저를 떠올리면 된다) 아니나다를까 건담도 신형메카라는 설정을 고집했는데, 마틸다 중위가 기를 쓰고 운반해온 신형메카 G 아마로 건담의 성능이 업그레이드되었고, 차후 아무로가 뉴타입으로 각성하면서 건담의 성능이 다시 떨어지자 이번엔 “마그넷코팅”이라는 필살기(?)를 꺼내들었다.

이렇듯 건담은 기체 발전의 측면에서 슈퍼로봇물의 전형을 밟아왔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 뒤에 숨어있는 “각성해가는 뉴타입”에 대한 고려도 결코 배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뉴타입이라는 설정이 초기의 “아무 능력도 없는 리얼한 주인공”에 대한 시청자의 기대를 어느 정도 깎아먹었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무로가 시리즈 막판에 – 기미는 중간부터 보이지만 본격화된 것은 막판이다 – 초능력자(?)로 탈바꿈한다는 시놉시스를 읽어보고 불끈하는 분노를 느꼈었다) 물론 아무로가 다른 슈퍼로봇물의 주인공에 비해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설정에 짜증이 난 시청자가 더 많았을 지도 모른다. (건담 TV방영분의 초기 시청률 약세는 그때문일지도…) 그렇기 때문에 의욕적으로 “리얼하게” 시리즈를 시작한 제작진이었지만 주인공을 완전한 초능력자도 아니고 평범하기만 한 주인공도 아닌, 어떻게 보면 “리얼한(있을법한) 초능력자”인 뉴타입이라는 설정으로 타협안을 제시했다고 본다.

분명 뉴타입은 초능력자가 아니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발달한 상태지만 염력같은 우리를 깜딱깜딱 놀라게 하는 초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다. “모든 생물체는 주변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진화해왔고, 인류도 주활동무대가 갇힌 지구가 아닌 넓은 우주로 나간다면 또한번의 진화를 할 것이다. 그 진화는 아마 정신적인 면에서 각성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지금은 도통 기억할 수 없는 어느 SF소설에서 모티브로 삼고있던 내용이었다. 배가 난파하기 전에 쥐나 개미들이 먼저 빠져나간다던지, 폭풍이나 큰 재해가 닥치기 전에 동물들이 먼저 알고 대피하는 모습 등에서 자연 속에 살고있는 동물들이 초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사람도 지금처럼 인공적인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 속에 살게 된다면 그런 초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우주에서 태어난 스페이스노이드는 일반 인류와 다른 뉴타입으로 태어난다는 설정… 그런 측면에서 빗대본다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는 막연한 초능력자들보다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역시 뉴타입은 설정만 복잡했을 뿐, 과거 슈퍼로봇물의 초능력자들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예전 슈퍼로봇의 조종사들도, 로봇을 조종하는데 무슨 초능력이 그렇게 필요했겠는가. 위기에 몰렸을때 조종하는 패거리들이 작당해서 머리를 모아 필살기를 날리는 정도, 손안대고 로봇을 움직이는 정도 어차피 그런 것 아니겠는가. 아무로나 다른 뉴타입들은 몰라도 라라아나 포우 같은 이들은 조종간을 깔짝거리는 것보다 마인드 컨트롤로 조종했다는 것이 옳다고 보면, 결국 거기서 거기인 셈이다. 이름만 바뀌고 설정만 복잡해진 초능력자. 내가 뉴타입을 보는 기본적인 시각이다.

쓸데없이 한마디 덧붙인다면, 최근 건담에서도 특히 리얼한 시리즈물로 평가받는 <0080>이나 <0083>, <08소대>의 공통점은 뉴타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