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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덴티티] 반전의 반전, 쉽게 해결하자

2003년 12월 22일

미리 경고하는데 영화를 안본 사람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해문출판사라는 곳에서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문고”를 출판하기 시작한 것이 대략 1985~6년쯤부터인 것 같다. 그 출판사가 왜, 무슨 이유로, 어째서 하필 아가사 크리스티의 책을 문고판으로 내려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권에 1,500원밖에 하지 않았던 그 문고판 소설책은 우리 또래에선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요즘도 추리소설은 아가사 크리스티 것만 봤다는 내 또래의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나 역시 그 큰 물줄기에서 예외는 아니었기에 설날 세뱃돈이나 친척어른들이 주고간 용돈으로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책을 한권 한권 사모으고 있었고. (전부 80권이 나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친구한테 빌려보고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한 걸 빼면 현재 집에 있는 책은 약 40권 정도 된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은 <나일 살인사건>이지만, (재클린 드벨포, 엄청 좋아했다) 일반적으로 꼽아주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최고 걸작은 다름아닌 <열 개의 인디언인형>(<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소개되기도 했다)일 게다. 고립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죽어간다는 설정, 분명히 그 안에 범인이 있지만 동시에 그들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그 설정은 그후 수많은 추리소설/스릴러영화/탐정만화 등에 차용돼왔다. <아이덴티티>도 바로 그런 영화 중 하나였으니.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 여관에 고립된 10사람(재혼한 남자, 그의 아내, 어린 아들, 갓 결혼한 신혼부부, 퇴물여배우, 전직경찰인 그녀의 운전기사, 살인범을 호송하는 경찰과 그에게 잡혀있는 살인범, 여관주인)이 한 명 한 명 살해되기 시작하고, 살해된 사람의 옆에는 여관방 열쇠가 놓여있다. (방번호는 10,9,8…식으로 줄어들고) 이렇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스릴러를 제법 즐겨본 관객이라면 누구라도 <열 개의 인디언인형>을 떠올리게 될 거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이 영화의 반전은 <열 개의 인디언인형>을 자연스럽게 연상했던 사람들을 위한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열 개의 인디언인형>이 <Y의 비극>으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냐구.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 즉 “범인이 누구냐”를 관객들이 찾아야 하는 영화에서 거의 항상 간과되는 것이 “범행의 동기”라는 점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범인이 어떻게 살해를 하고 어떻게 빠져나가고 어떻게 혐의에서 멀어지고, 이렇게 관객을 속여먹기위한 플롯의 정교함에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문제인 “왜 죽였는가?”가 마구 무시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들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우선 “동기”부터 찾는데 말이다. <열 개의 인디언인형>에서도 인디언섬에 모인 열 사람이 모두 “처벌받지않은 살인범”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법을 대신해서 그들을 심판한다는 – 사실 여기서 아가사 크리스티는 범인에 대한 엄청난 힌트를 준 셈이다 – 동기를 부여하고 시작하지만, 그 후의 아류작들에게서는 살인동기를 그토록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경우가 몹시 드물지 않았던가 말이다. (참고로 나는 아직도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가 왜 다른 사람들을 죽였는지 이유 모른다) 플롯의 독특함은 가져오면서도 그렇게 굳이 연쇄살인을 저질러야할 딱히 마땅한 이유가 없다보니, 고작 나오는 동기라는 것이 살인마, 미치광이, 뭐 그런 종류로 대충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왜”는 없고 “어떻게”만 강조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아이덴티티>는 “왜”는 물론이고 “어떻게”에서도 상당히 불성실한 반전을 갖고 있다. 외국에서도 국내에서도 이 영화의 결말을 놓고 이런저런 해석이 많이 튀어나왔다던데, 사실 이 영화의 반전이 되는 키워드를 끼워넣으면 뭐든지 설명이 될 수 있다. (이 점은, 반전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올드보이>도 마찬가지다) 감독의 숨은 의도나 대사 하나 동작 하나까지 일일이 설명하려는 건 관객들의 지나친 지적허영심인 것 같고, “살인사건은 실제가 아니고 주인공(?)의 머리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결론은 정말 딱, 관객들 뒤통수나 치기 위한 결론일 뿐 “공정한 경쟁”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겠는가. 그 전제 하나로 범인이 어떻게 사람들을 죽이고 그 옆에 열쇠를 갖다놓았는지는 전혀 설명할 필요가 없어져버렸으니 말이다. 아 그냥 상상 속에서 죽이고 죽은 것 뿐인데 거기에 이유나 과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구.

내가 보기엔 그냥 딱, 치밀하게 대본 잘 쓴 좋은 스릴러 영화 정도다. “정신질환”이라는 키워드를 넣어서 모든 문제를 “아 그거야 미쳤으니까~”라고 해석해버리건,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 그것도 분열된 열 명의 자아 모두를 – 철저하게 분석해서 아 그 이유는 그렇고 그 이유는 또 이렇고… 라고 장문의 논문을 집필하건 그건 각자의 몫일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