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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사실 숨기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지?

2003년 12월 22일

미리 경고하는데 영화를 안본 사람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어디선가 솔솔, “엄청나게 충격적인 반전”을 갖고 있는 영화가 촬영 중이라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감독과 배우 면면이 상당히 화려한데다 스태프들이 “절대로 내용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촬영에 임할 정도로 보안을 철통같이 지킨다는 그 영화, <올드보이>는 그렇게 세간에 알려졌다.

어떤 사람은 각서니 뭐니 하는 것들부터 “광고”나 “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서 이상하게 잦아진 “충격적인 반전”을 갖고있는 영화에 익숙해진 영화팬들은 과연 “얼마나 충격적이길래”라는 기대감을 갖고 <올드보이>를 기다리고 기다렸을 거다. 그 기대감이 흥행 대박으로 이어진 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각서 어쩌구 한 것부터가 “쑈”였다는 일부 사람들의 불평 아닌 불평도 영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먼저 밝히고 가자면, 나는 박찬욱 감독의 “과함”을 싫어하는 편이다. 글쎄, 한 감독의 성향을 한 마디로 단정지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대략 내가 아는 박찬욱의 성향은 “(일반적인 관객들의 기대보다) 좀 더 강하게 간다”는 것이다. (시각에 따라선 많이 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화면빨로 표출되건, 음악으로 표현되건, 하여튼 좀 강하다. 이게 우리가 흔히 쓰는 “오바”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오바”와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나는 “강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단어도 적당한지 잘 모르겠고… 하여튼 내가 그런 부분을 싫어한다, 는 정도로 정리해보자.

<올드보이>는 감독 스스로도 말했듯이 “과하게 만든 영화”다.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해서 순해진 부분도 있지만)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강하게 나간 것은 사실 화면이나 음악이 아니고 충격적인 반전도 아니었다. (반전? 반전일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대담하게도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뤘고, 그것도 “근친상간이 사회적 통념상 용서될 수 없는 일”이라는 전제를 일반 통념보다 훨씬 강하게 깔아놓고서는 뻔뻔하게 관객들에게 ‘근친상간’을 확 집어던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근친상간을 다룬 영화 따위는 이 땅에서 사라져라’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올드보이>가 근친상간을 주제로 다루고 있으니 나쁜 영화라거나, 사회적 금기를 이용해 돈벌어먹는 이율배반적인 영화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올드보이>는 결말만 놓고 보면 근친상간 하면 전부 파멸한다, 천벌을 받는다 뭐 이런 주제를 홍보하는데 훨씬 알맞는 영화라고 본다.

나로 말하자면, 자기 딸하고 섹스했다는 사실을 자기 딸이 알게될까봐 자기 혀를 손수 잘라버리는 최민식의 심정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에 직면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영화를 찍어버렸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가 주인공이 자기 혀를 스스로 잘라버릴 정도로 ‘이건 나쁜 짓’ ‘해서는 안되는 짓’이라는 전제를 강하게 깔았단 말이다. 하지만 ‘나쁜 짓’이라는 것에 공감하는 관객들도 ‘혀를 잘라버리는 행동’까지 공감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이 관객들의 기대보다 더 강하게 나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근친상간의 폐해’에 대해 일반 관객들의 거부감보다 훨씬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보이>가 만약 줄거리가 알려지는 것을 굳이 막지 않고, 반전이 어느 정도 새어나가는 것을 방치해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근친상간 영화가 나온다’고 신문 지상이 떠들썩해졌을 거다. 영화가 개봉된 후 세계일보하고 국민일보던가? 하여튼 두어 개 신문에서 “사설”에서 때려주실 정도였는데, 개봉 전에 그런 사설 안나왔을 것 같은가. 성균관 같은 고매하신 곳에서 ‘상영금지 가처분신청’ 뭐 이런 거 법원에 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올드보이> 영화 속에서 근친상간이 어떤 수준으로 다뤄지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 영화 내용 면밀히 따져가며 걔네들이 그런 지랄 했었나. 그런 기억과, 박찬욱 감독의 ‘근친상간’에 대한 강한 묘사들을 보고났더니, 나는 왠지 <올드보이>의 결론이 ‘근친상간’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굳이 각서까지 받아가며 숨겨야했던 이유가 단순히 스포일러를 피해가려는 의도만은 아니었던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개봉하지 않았으니)에서 ‘근친상간’이라는 키워드가 외부로 알려질 경우, 영화 상영 또는 흥행에 지장이 되고 않고를 떠나서 불필요한, 상당히 피곤한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미리 막아보려는 의도도 상당히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지금까지 별 시덥잖은 이유로 영화개봉이 무산되고 제목 바뀌고 했던 사례가 어디 한두 개였어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