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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리일기 여섯번째

2007년 3월 7일

[봉대리의 일기]

12/03 (금) 맑았었던거 같다…

즐거운 금요일~
군대 있을 때 선임하사님의 명언이 생각나는 날이다.
뽕일병, 술이란 말야 월요일하고 금요일에 먹어야 되는 거야.
월요일날 술을 먹고 일주일을 그냥 술기운으로 보내고
금요일날 술을 먹고 주말을 그냥 술기운으로 빨아버리는 거지.
우주인론 이후 이만큼 술에 관하여 가슴을 후벼파는 멘트는 들어본 적이 엄따.
우쨌끼나,
오늘도 술약속이 있었다.
사내 회식? 미쳤냐? 어제 피 부장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회식을 하면 그것은 덮어씌우기 2차시도임이 거의 틀림없다. 거기에 말려들라구?
간만에 연락이 온 학교 선배를 만났다.
한창 상황이 좋을 때 졸업해서 취직도 번듯한 곳에 하고 잘나가던 선배인데
작년에 암에푸 터지면서 소식이 끊긴 선배였다.
나야 순전히 술먹구 싶어서 약속 잡았지만 선배는 그냥이 아닌 거 같았다.
실직한 거는 분명한 거 같은데… 뭘까?
정수기일까? 보험일까? 연대보증일까? 아니면 피라미드…?
하지만 생각 외로 선배는 그런 종류의 냄새는 비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계를 풀면 안된다… 나는 요즘 월급이 자꾸 깎인다… 정수기는 얼마전
어무이가 임대로 하나 들여놨다… 회사에 찾아오는 보험 아줌마들 때문에 미치겠다…
이런 식의 말을 교묘하게 대화에 섞어서 언제 터져나올지 모르는 선배의 말을 미연에
차단해냈다.
술자리는 2차, 3차로 이어졌는데 선배가 계속 술값을 냈다.
술값을 다 내는 걸 보니 분명히 뭔가 바라는 게 있는데 말이지.
그러나 1시 넘어서 포장마차에서 코가 삐뚤어진 상태로 빠빠이 할 때까지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택시비까지 얻어서 집에 들어왔다.
너무 철벽방어를 한 건가?
괜히 찜찜하네…

[봉대리 선배의 일기]

12/03 (금) 날씨에도 관심있어야 되나…

회사를 관둔지 오늘로 1년째되는 날이다.
마침 금요일이고… 술먹기도 좋고 해서 오늘은 술로 기념하기로 했다.
별로 벌어놓은 것도 없이 그동안 마누라 신세만 지고 살았으니
오늘 누가 걸리던지 술값은 내가 벌어서 내리라 작정하고
지난 일주일 마누라 몰래 잡일하는 알바를 좀 했다.
하루 종일 하면 의심받을까봐 시간제로 했더니 일주일한 것치고는 돈이 좀 적었지만,
그래도 하루 뽀지게 술먹을 돈은 충분하길래 괜히 기분 좋았다.
마누라한테 술먹고 늦게 들어올 거라고 말하고 집을 나오는데
괜히 얻어먹으면서 핀잔 받지말라고 마누라가 얼마를 찔러준다.
이러지마 돈있어… 그러면서 돈을 사양하고 부랴부랴 나왔다.
내가 착한 여자를 얻은 복많은 놈인지 멍청한 여자를 이용해먹는 나쁜 놈인지 가끔
헷갈린다.
나는 전자라고 우기는데 친구들은 다 후자란다.
절교해버려야지 씹숑들.
무작정 나와서 한동안 연락을 끊었던 친구들에게 두루두루 전화를 쌔렸다.
젠장… 모두 선약이 있단다. 되게 망설이는 말투가 정말 미안한가부다.
하기사 금요일은 술먹기 좋은 날이니 뭐. 연락이 늦은 내가 바보지.
그런데 가만있자… 석규하고 민식이는 같은 회사 같은 부서 아닌가?
근데 왜 석규는 부서 회식이고 민식이는 과장님 초상난 곳에 가는 거지?
참 복잡다난한 부서임에 틀림없다. 아마 상가에 가서 회식을 한다는 얘긴가 부다.
대부분 선약이 있는데 겨우 걸린게 대학교 후배인 뽕대리 하나.
그래도 전화를 받자마자 늑대처럼 우우~ 울면서 술만 사주면 장땡이라고 외치는 걸
보니 옛날 순수했던 학창시절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 짜샤. 내가 오늘 뽀지게 사주마.
술먹는 내내 봉대리 놈은 회사에서 되게 힘든지 계속 월급이 적다고 투덜거렸고,
건강에도 꽤나 신경을 많이 쓰는지 집에 정수기 들여놨다고 세번이나 자랑했다.
일도 열심히 하는지 보험 아줌마들이 업무에 방해된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늘었는지 피라미드 판매에 대해 열띤 성토도 서슴지 않았다.
여전히 변함이 없는 거 같아서 좋았다.
2차 3차 포장마차에서 4차까지 뿅뿅 다 쏴주고
오늘 너무 즐겁게 해준 후배에게 마지막 남은 돈 탈탈 털어서 택시 태워보내주고
나는 터덜터덜 걸어서 집에 들어갔다.
저런 후배가 아직 나를 반겨준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다.

SIDH’s Comment :
세번째 일기에 달았던 코멘트를 뒤집어서 반복.
나 스스로는 이 에피소드가 대단히 맘에 들었었다.
같은 상황을 겪은 두 사람이 각자의 편견에 의해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받아들인다는 (그런 의도였다는 얘기다)
그 부분이 원래 <봉대리일기> 취지에 잘 들어맞는 것 같아서
오늘 내용 재밌다고 당시 회사에서 동네방네 자랑질하고 다녔었다.
다음날 반응이 어찌나 차갑던지 혼자 무척 당황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