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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리일기 일흔여섯번째

2007년 12월 9일

[봉대리의 일기]

3/16 (목) 끝내 비는 오지 않았다…

오늘 점심때 사소한 일로 황대리와 시비가 붙었다.
반찬으로 메추리알을 삶아서 나왔길래 젓가락으로 툭툭 건드려보다가
큐걸이를 잡고 오시 시네루를 한번 땡겨봤다.
짜식, 하수 주제에…
뭐야 임마?
같은 300인데 황대리가 대뜸 하수라고 부르는게 아닌가?
자존심 하나로 똘똘 뭉친 인간 봉달중이 그런 걸 쉽게 넘길 리가 없지.
앗쭈, 기본 가락도 삑사리내는 주제에…
웃기구 있네. 너야말로 초구도 못쳐서 헤매잖아…
아니 이놈이 나의 유일한 약점까지 들춰내서…
너 씨 봐. 한판 붙자.
좋아. 지금 할까?
하자.
옆에 앉아있던 전유성이가 온몸으로 우리를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오후 회사 제끼고 [불타는 당구다이] 영화 한 편 찍었을 거다.
참으세요. 오후에 피부장님이 회의 소집했습니다. 그거 빠지면
끝장이에요.
좋아. 퇴근 후 바로 보자.
그래. 빠구리 당구장에서 보자.
(이 당구장은 이름이 좋아서 손님이 늘 북적거린다)
오후내내 분이 삭질 않고 오히려 더욱 끓어오르기만 했다.
사무실에 있는 초록색은 모두 다이로 보일 정도로…
드디어 짜장면 얻어먹으러 왔다는 전유성이를 대동하고 빠구리
당구장에서 맞부딪혔다.
어이고~ 초구 못치는 삼백이 또 오셨구만~
당구장 주인아자씨의 친근한 인사가 나의 투쟁심에 기름을 부었다.
쿠션으로 승부하자!
조치!
공 세 개 깔아놓고 큐대에 쵸크칠 무지하게 긁어댔다.
황대리도 흥분했는지 열라 쵸크칠하다가 쵸크에 구멍을 뚫고 말았다.
(손에는 분필 가루가 퍼렇고…)
음… 다행히 가위바위보를 이겨서 초구는 내가 치지 않았다.
(초구는 내 약점이다… 솔직히 인정한다. 그게 왜 안맞을까?)
음… 짜식이 가볍게 초구에서 쿠션 두 개 뺀다…
그리구 공도 어렵게 모아놓고 혓바닥까지 낼름 내민다.
가공할 개구리놈 같으니…
넥타이를 와이셔츠 왼쪽 주머니에 접어넣고 큐걸이 자세를 취했다.
음… 공이 안보이는군.
안되면 되게하는… 환상의 힘다마 공포의 가락길로 공을 날렸따.
하나 박았다.
황대리 놈… 한개 두개 꾸준히 치면서 꼭 빠질 때면 겐세이 해놓는
유치한 짓거리로 나의 다마길을 죄다 막아놓았다.
저 자식 언제 나몰래 연습했나?
녀석이 가락까지 뺐을 때 나는 열개나 남아있었다…
봉대리님 짜장면 세개 시킬께요~
껨돌이 하던 전유성한테 큐대로 매타작을 해주고 다음 게임으로
들어갔다.
윽… 초구를 놓쳤다.

시계는 11시를 가리키는데 진짜, 한판도 못이기고 내내 지기만 했다.
이제 가자구.
미쳤냐.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안돼. 한판만 더하자.
차 끊겨.
웃기지마.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거야. (무슨 말이지?)
마지막으로 몰아주기 한판 어때?
너야말로 웃기지마라. 내가 여태 다 이겼는데 왜 몰아주기를 하냐?
이기면 본전이고 지면 손핸걸.
좋아. 지면 내가 내일 점심하고 저녁까지 사지. 어때?
약한 놈… 밥에 넘어갔다.
앗! 행운이 내게로 왔다.
일년에 한번 맞을까 말까한 초구가 이번엔 맞고 말았다!!!!!!!!!
초구가 들어가는 걸 본 황대리의 표정이 흑빛으로 변하고,
우리 당구장 생긴 이래 봉대리 초구 넣는 장면은 처음 봤다는 당구장
주인 아자씨의 격정적인 멘트가 이어졌다.
이거거덩!
드디어 다마빨이 받기 시작했는지 일곱개를 연달아 뽑았다.
기레까시 오마우시 우라 짱꼴라 딸딸이 리보이스 황오시까지… 치는
대로 안들어가는 게 없었다.
황대리 일용이 하면서 따라오는데 하하 우습지 뭐…
돛대야! 황대리가 못치고 나온 다이로 한걸음 다가가며 내가
호기넘치게 외쳤다.
그런데 앗….!
다이에 놓인 공은… 초구 모양이었다…
이를 어쩌지? 아까는 하나 겨우 넣었는데…
이번에 또 된다는 보장이 없잖아?
황대리는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실실 웃고만 있다.
좋아… 멋지게 끝내보이리라… 멋지게 폼을 잡고 다마를 날렸다.
내가 다마를 치는 순간 둥그레지는 황대리의 얼굴…
공은 노란 다마를 때리고 잽싸게 똥창을 돌아서… 데굴데굴 굴러서
다음 공과 정확히 부딪혔다.
만세! 가락이다!
하나 박아라.
황대리가 덤덤하게 말했다.
뭘 박아?
너 빨간 다마 쳤어.
…………..
초구 모양을 보고 흥분한 나머지 빨간 다마를 쳤다.
그래서 재수 옴붙었는지 그 게임도 역전패 당했다.
당구를 끊어야겠다.
오른 손을 짤라버릴까?

[황대리의 일기]

3/16 (목) 이쒸… 허리만 아프게 하고…

요즘 통 사무실 사람들하고 당구를 쳐보지 못했다.
맨날 동네 사람들하고 쳤다.
참고로 우리 동네는 인천이다.
누가 인천다마 짠다마라고 소문 냈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 정말 맞는
말이다.
처음엔 멋모르고 예 저도 삼백 칩니다, 그러고 쳤는데,
젠장 이게 삼백이면 나는 이백도 안되겠더라.
한 두어판 그렇게 깨지고 나니까 당구장 분위기가 흉흉해지더만.
저놈들 혹시 사기당구단 아닐까?
그런데 가는 당구장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자기가 삼백이라고 우기는
거다.
음… 이게 삼백 맞나보군.
그 다음부터 겸손하게 이백으로 내렸다. 동네에서만…
(씨펄 하수라고 끼워주지도 않더만)
그래도 꾸준히 동네에서 갈고 닦았더니 요즘은 동네에서도 삼백을
놔도 될만큼 성장하였다.
시험삼아 그 후 학교 선배하고 한 게임 붙어봤는데
같은 삼백인 그 선배와 나는 이미 기량차이가 나고 있었다.
이 씹새끼 너 삼백 맞아? 사기다마 아냐?
무슨 소리… 인천다마입니다.
한마디에 선배는 찌그러졌다.
자… 그럼 이제 사무실로 진출해볼까.
만만한 봉대리를 골랐다.
(사실 팔십인 전유성이하고 치겠나… 백오십인 조과장하고 치겠나…
실력이 미지수인 오과장은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고…)
역시 예상대로 간단한 자극에 쉽게 걸려들었다.
처음엔 조금씩 봐주면서 쳤는데 당구라는 스포츠는 매우 정신적인
스포츠라서… 이미 흥분한 봉대리가 오 백에 가까운 실력을 쌓은
나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득달같이 달려드는 봉대리가 조금 불쌍해서 슬슬 봐주면서
치다가 아슬아슬하게 이겨버렸다.
음… 나는 생각해서 그런건데 더욱 흥분한다.
야 그냥 못가. 이거 몰아주기 한판 하자.
미쳤냐 몰아주기를 하게.
하자! 내가 지면 내일 밥까지 살께.
오오~ 내가 그럼 안할 이유가 없지~
엇! 그런데 봉대리가 미쳤는지… 평생 들어갈까 말까하다는 초구를
치는 게 아닌가!
당구장 주인아저씨까지 흥분할 정도로 드라마틱한 초구였다.
바람을 탔다고나 할까… 봉대리의 큐대질은 이미 예술의 차원에
들어가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은 다마가 쫑다마로 들어가는 행운까지…
그리고서 드디어 돛대… 머리를 굴렸다… 공을 찢어놔야 된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 생각이 공을 초구 모양으로 모아주자! 였다.
음… 역시 나도 큐대질이 예술 수준인지, 치지는 못했지만 두 다마를
모아 놓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쳐보셔~
과연 긴장하는 봉대리.
봉대리에게 어떤 가락보다도 어렵다는 초구, 과연 해낼 것인가!
당구장 주인아자씨가 빈 다이에 걸레질 하다말고 뛰어와 숨을 죽이고
지켜 봤다.
그런데… 긴장한 봉대리가 빨간 다마를 앞에 두고 펌프질을 하는게
아닌가…
주인아저씨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내가 그윽한 눈빛으로 제지
시켰다…
그러나 봉대리 장하다… 빨간다마지만 다시 한번 초구를 성공시키는
실력을 발휘 했으니…
잔뜩 물리고 비참한 표정으로 떠나는 봉대리에게 위로의 박수를
보낸다.
내일은 오백 친다는 개발팀 변대리하고 붙어봐야지.

SIDH’s Comment :
이때만 해도 직장인들끼리 퇴근 후 당구 한판, 이라는 따뜻한 정이 오가곤 했는데.
물론 요즘도 그런게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예전만은 못한 거 같다.
단적인 예로다가 우리 사무실 위층에 있는 당구장이 망해서 나가버렸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