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동기 중에 삼성라이온즈의 골수팬인 녀석이 하나 있다.
이 녀석, 삼성이 9번의 한국시리즈 도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이 천추의 한이었는데
드디어 2002년, 이승엽의 동점 3점포와 마해영의 끝내기로
삼성이 첫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던 바로 그 순간에
울산에서 치러진 동기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요즘은 흔한 DMB는 커녕
고속버스에서 위성TV 틀어주는 것도 드물던 세상이라 (개국은 했었지만)
그 감격의 순간을 라디오로만 들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번엔 내가 됐다.-_-
결혼 1주년 기념일을 맞아 저녁 약속을 잡아놓고
마침 낮에는 친구들과 생일 약속이 있던 마누라를 픽업(?)해오기 위해
밖으로 나갔을 때 스코어는 5:3.
5:1로 벌어지는 순간 에이고 네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며 자포자기였다가
투런 홈런 터지는 거 보고 어 설마 하며 도로 주저앉았다가
더이상 점수 못내고 빌빌빌 하는 거 보고 그냥 나간 거 였다.
지하철 타고 가다가 중간에 DMB로 중계를 보던 애들이 홈런 홈런 그러길래
아 또 왠놈이 홈런을 쳐맞은게냐 하며 슬쩍 들여다보니
베이스 도는 놈은 난데없는 우리 치홍이-_-;;
치홍이가 7회말 선두타자니까 솔로홈런. 7회초에 점수 안줬으면 5:4로 쫓아갔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누라와 약속장소인 지하철역에 내렸다가
지나가던 분식집에서 HD TV로 중계장면이 나오길래 가던 걸음 멈추고 잠시 감상.
7회말 투아웃에 주자 만루 타석에는 김상현.
어머나 여기서 한방이면 역전도 가능하네… 하다가 스코어를 보니
어느새 5:5 동점-_-;;;;;
그래 ㅆㅂ 한방 날려라 하며 분식집 창가에 기대어서서-_- 중계를 보는데
1루 파울플라이 아웃.
더 볼 마음이 없어져서 그냥 갔다.
마누라 만나서 다시 지하철 타고 오는데
옆에 있는 놈이 보는 DMB를 슬쩍 보니 SK공격인데 주자 2루-_-;;
투수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어째 조짐이 좋지 않았다.
한 점 주겠네, 그러고 있는데 DMB 보던 녀석이 내려버려서 결과는 모르고-_-;;
마누라는 그럴거면 자기 DMB를 가져오지 그랬냐고 그러던데
그 생각은 못했지 내가-_-;;; (내 꺼가 아니라서…)
아무튼 목적지에 내리려는데 옆에 있던 놈이 또 DMB를 보는 거다.
슬쩍슬쩍 보니 (짜식이 내 눈치를 느끼고 슬그머니 가리더라는…) 채병룡이 마운드에 올라서 몸 풀고 있더라.
시간 상으로 봤을 때 8회말일 가능성은 별로 없고, 그렇다면 9회말이라는 얘긴데.
9회말 공격을 하고 있다는 건 최소한 타이거즈가 이기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냥 그렇구나, 비기고 있으면 어케 연장이라도 가보고 지고 있으면 동점이라도… 하는 생각밖에 안들더라.
그렇게 지하철 역을 나와 시청앞 광장을 지나가는데
무슨 행사중이었는지 전광판에 나와서 사회를 보던 김병찬 전 아나운서가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한국시리즈 7차전은 기아가 9회말 끝내기홈런으로 6:5 승리를 거두고 우승했습니다”라고 멘트.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얼른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보니 나지완이 끝내기홈런을 쳤다나.
이렇게 해서 12년간 기다려왔던 타이거즈의 우승을 라이브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뭐 라이브로 보는게 그리 중요한가?
우승만 하면 되는 거지 ㄲㄲㄲ
솔직히 한국시리즈 시작할 때는 그냥 4:0으로 이겨버려라, 그랬었는데
그거야 그냥 한 경기 두 경기 질 때마다 마음 졸이기 싫어서 그런 거였지만
초반 1,2차전을 다 잡으니 솔직히 욕심도 나긴 나더라.
3,4차전 발리면서 모든 건 다 꿈이 되어버렸지만.
하지만 5차전을 앞두고
속해있는 야구 커뮤니티에 “7차전까지 가면 무조건 우승”이라고 예상을 써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7차전 SK 선발이 글로버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 탓이었는데
하여튼 그렇게 예상했던 이유는
타이거즈의 5,6차전 선발이 로페즈와 윤석민이라고 하면
얘네들이 무너진다고 해도 3점 이상은 주지 않을 거다,
그러면 선발이 약한 SK는 불펜을 마구잡이로 투입해서 경기를 잡으려고 할 거고
이미 플레이오프부터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한 SK 불펜이
7차전쯤에는 분명히 사단이 날 거다, 라는 거였다.
어찌 됐건 예상은 맞은 셈.
김성근 감독 입장에서는 차라리 불펜을 믿고 가는 게 나았을텐데
괜히 선발요원인 카도쿠라 채병룡을 땡겨 쓰다가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글로버를 일찍 내린 것도 마찬가지)
정규시즌 1위의 프리미엄을 극한으로 누렸다고 할 밖에.
그리하여 타이거즈의 12년만의 V10.
타이거즈 이후 최초로 3연패에 도전하던 SK를 주저앉힌 것도 의미있지만
1997년 이후, IMF와 함께 몰락한 뒤 기나긴 패배주의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팀이
시즌 초반만 해도 꼴찌부터 하위권까지 왔다리갔다리 하던 팀이
기적같은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주고 싶다.
언젠가는 이룰테지만 그저 꿈처럼만 여겨졌던 V10을 이뤄냈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 V11을 기다려야겠다.
그게 내년이 될지, 다시 12년을 기다려야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는 초조해하며 기다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는 것.
KIA 타이거즈의 2009년 정규리그/한국시리즈 우승을 축하합니다.
당신들이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28년 골수 타이거즈팬 시대가 썼습니다.
시대님 글 올라오길 기다렸습니다 ㅎㅎ 기아 팬으로써 너무 행복합니다.
Go~Tigers! Go~V 11~!!
골수팬이시라도 와이프가 더 중요하셨네요…
울서방 같음 데릴러 안나왔을텐데…
결혼1주년 외식중에 DMB켜노쿠 밥먹구 건성건성 대답하고……
게다가 마지막 경기도 아닌것을…
결국 대판하고 나왔다는….
그때부터 야구의 “야”자만 들으면 욱~한다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