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3일

어제 파주에 있는 인쇄소에 들렀다가 오후에 출근해보니
사무실 사람들은 거의 다 현장이니 외근이니 휴가니 해서 자리에 없길래
괜히 혼자 늘어져서 빈둥거리고 있던 찰나
마누라가 네이트온으로 말을 걸어옴.

“뭐해?” 하길래 인쇄소 다녀오느라 고생한 썰을 줄줄이 풀어놓으려던 순간
“아 나 오늘 진짜 우울해” 이러는게 아닌가.

요즘 애기가 떼쓰는 상황이 많아져서 급우울해진 건 아는데
덩달아 나까지 주말에 출판 문제로 바짝 바쁜 바람에 애를 못봐줘서 힘들었던 건 아는데
난데없이 말걸어 우울하다는 건 뭔가 사건이 터졌단 얘기겠지.

하여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비밀번호 입력 실패로 인증서 오류가 나서 계좌송금이 안된다는 거.
마누라가 인터넷 아이디/비밀번호를 사이트마다 다 다르게 해놔서
오랜만에 접속하는 사이트에는 어떤 아이디/비밀번호로 가입했는지 헷갈려 한참을 헤맨다는 사실을 아주 자~알 알고 있는 관계로
그럴만하지, 싶어 넘겼더랬지.

평소 중고사이트에서 애기용품 이것저것 사모으는 걸 잘 알기에
급히 돈을 안보내주면 다른 사람한테 순번 넘어갈까봐 전전긍긍하는 것 같아서
얼마 보내야되냐고, 내 계좌에서 일단 넣어주마고 그랬는데,

400만원이라는 거지.

사실 이 대목쯤에서 의심을 해봤어야 되는데
사기 당하는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 이게 설마 사기겠어? 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응 그런가부다 하고 또 그냥 넘기고.
일단 내 계좌에는 백만원도 없기 때문에 보낼 수도 없었으니.
400만원 없어, 그랬더니 일단 100만원만 보내달라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한다고, 뭐 이런 이야기를 해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의심 안하다가
(주말부터 월요일~화요일까지 수면부족 상태로 일을 계속 하는 바람에 머리가 멍해진 탓일지도)
문득 생각해보니, 우리집 메인계좌는 내 공인인증서로 접속하는데 마누라도 비밀번호를 안단 말이지.

거기서 웃긴게 야 그냥 네가 내 인증서로 접속해서 송금하면 되잖아 이런 생각은 또 못하고
(머리가 멍해진 탓이라니까…)
야 내가 여기서 W은행 접속할테니까 네가 카드비밀번호(송금용) 불러주면 되겠네 그랬다는 거.
그랬더니 그럴 정신이 어딨냐고 그러는데
그때서야 슬그머니 이거 혹시…? 싶어지더라는 거.

되짚어보니 40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_- 돈도 말이 안되고
(나도 모르는 400만원이 갑자기 나갈 이유가 없잖아)
은행 가서 인증서 풀려니 일이 바빠서 못간다는 말도 했는데
첨엔 애보느라 바쁘다는 뜻인가 해서 넘어갔지만
애기 보느라 정신 없어서 평소 인터넷도 잘 못하는데 일단 인터넷에 접속했다는 건 애기가 자거나 비교적 평온하다는 얘기.
그리고 평소라면 소윤이 때문에 못간다느니 그랬겠지 굳이 “일”이라고 하진 않았을테고.

십중팔구 마누라 아이디가 해킹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대꾸 멈추고 마누라한테 “네가 지금 나한테 400만원 달라고 한다”는 문자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오더라.
다른 친구도 지금 자기가 800만원-_- 달라고 해서 자기한테 전화왔다고.

그 사이에 무슨 신고가 들어갔는지 내가 대꾸가 없으니 낌새를 챘는지 (마누라가 아닌) 상대방은 로그아웃.

마누라가 대화중 신고 기능이 있다고, 나보고 그거 좀 해보라고 해서 봤더니 상대방이 로그아웃해버리면 방법이 없다는 점.

인터넷 접속할 시간 있으면 비밀번호부터 바꾸라고 하고 전화 끊은 뒤 생각해보니
그동안 우리 사무실 김과장이니, 또 다른 여직원 선배니, 미국 가있는 누구니 이런저런 사람들이 네이트온 아이디 해킹 당해서 돈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숱하게 들었는데
막상 당해보니 야 이거 잘못 걸리면 그냥 400만원 날리는 거네 싶더라는.
(하필 상대방이 마누라여서 그랬을지도… 다른 친구 같았으면 나한테 돈 달라는 말을 할 리가 없음. 내 성격을 모를리가)

메신저로 돈 이야기 하는 건 무조건 의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시대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