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제갈양의 라이벌(2) – 육손

2003년 7월 21일



육손

오군 오현 사람으로 자는 백언(伯言). 소패왕 손책의 사위. 아직 어린 나이로 뛰어난 지략을 지녀, 관우의 배후를 불의에 습격한 꾀도 그에게서 나왔고, 뒷날 유비가 복수의 군대를 움직여 연전연승하였을 때, 역전노장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침착하게 작전하여 유비의 40여 진지를 불살라 역으로 승리로 이끈 것이 모두 그의 지모에서 나온 것이다. 유비를 추격할 때 어복포에 이르렀을 때는 제갈양이 남긴 돌로 쌓은 팔진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을 가까이 살던 제갈양의 장인 황승언이 구해주어서 살아났다. 뒤에 승상이 되었는데 태자를 폐하는데 반대하였다가 노염을 사고 물러나 병들어 죽었다.

유비를 격퇴한 장수

삼국지 전체 맥락에서 워낙 오나라가 비중이 약하다보니, (하나마나 한 이야기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오히려 오나라에 대한 내용이 촉나라보다 훨 많다) 육손이라는 장수가 뭘 했는지에 대해 아리까리한 독자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잘 기억해봐야 여몽이 관우를 사로잡은 싸움에서 꾀를 빌려준 일, 그리고 유비의 대군을 격퇴하여 오나라를 구해낸 일 정도를 기억해낼 것이다. 고작 그 정도를 가지고 이 글의 타이틀을 “제갈양의 라이벌”씩이나 붙인 것에 대해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키려는 사람 또한 깨나 될 것이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제갈양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꼽히는 주유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린 탓에 육손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육손이야말로 제갈양과 가장 처지와 상황이 비슷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발탁된 백면서생이라 주위 사람들에게 상당히 무시를 당했다가, 위급한 상황에서 대규모의 적군을 한방에 무찔러버리는 아싸리한 면을 갖췄던 점 등 흡사한 부분이 많다.

제갈양과 두 번의 간접대결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치 서로 앙숙처럼 엉겨붙은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제갈양과 주유가 창칼을 맞부딪힌 적은 없다고 보여지는데 반해, 육손과 제갈양은 직접은 아니지만 두 차례에 걸쳐 간접대결을 펼친 바가 있다. 첫번째가 바로 오나라의 군대가 형주를 함락하고 관우를 사로잡은 싸움이었고, 두번째가 끝내 유비를 죽음으로 몰아버린 이릉싸움이었다. 하지만 두 싸움 모두 승자는 육손이되 패자는 제갈양이라고 할 수 없다. 관우의 패배는 제갈양과 완전 무관한 싸움이었고, 유비의 패배도 대충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대목에서 하나의 심통(?)을 부리고 있으니, 전설에서만 전해지는 제갈양의 팔진도를 등장시켜 그 속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육손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그러하다. (마지막 대목에서 “역시 승상의 재주는…” 어쩌고 하며 감복하는 육손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왜 그런 악의적인(?) 묘사를 굳이 집어넣었는지 답은 뻔한 것이고… 그 바람에 오나라의 후반부 중흥기를 이끌 육손의 이미지가 “잔재주나 부리다가 제갈양에게 된통 당한 서생” 수준으로 깎인 셈이 되었다. 아무리 제갈양 신격화가 좋아도 그렇지…

그럼 육손은…?

단지 육손이 전쟁에서 큰 공을 많이 세웠다는 정도라면 나는 그를 “제갈양의 라이벌” 반열에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권은 유비를 물리친 이후 많은 부분을 육손에게 물어 처리했고, 많은 상을 내렸으며, 나중에는 오나라 승상의 자리까지 주었다. (혹시 이러한 내용을 몰랐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외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나라 안의 기강을 잡는데에도 소홀함이 없었으니 촉나라의 문,무를 총괄하던 제갈양과 비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