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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샤아의 용병술

2003년 8월 25일

얼마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읽다가 “선조실록”부분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발견했다. “선조”라는 이름에서 쉽게 연상되듯 임진왜란, 특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전과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듣고 또 들어온 이야기라서 새삼 내가 좋은 이야기 덧붙이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래도 굳이 다시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새삼 숫자로 확인한 이순신 장군의 전과가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막연히 이순신 장군이 잘 싸워서 일본 수군이 우리나라에 범접을 못했네, 좀 자세해져봐야 명량해전에서 12척으로 300척 일본군을 깨뜨렸네… 뭐 이런 정도로 이순신 장군의 전과에 대해 파악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실록>에 따르면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어느정도 염두에 두더라도)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침몰시킨 적군의 전함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아군의 피해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전함 한 척 잃지 않았으며, 침몰시킨 적군 전함 숫자와 우리군 부상자 숫자가 비슷할 정도의 엽기적인 전과를 올리는 일도 다반사였던 것이다.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도 책 속에서 이순신과 원균의 차이점을 “부하를 아끼는 부분”이라고 언급하는데, 단순히 부하들을 사랑으로 대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부하들의 목숨을 아껴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법을 구사했던 점도 그 말에서 함께 평가되고 있었다.

그 대목에서 사실 샤아 아즈나블을 떠올렸다. 고등학교때 <기동전사 제타건담>의 소설판을 읽으면서 상당히 인상깊게 읽혔던 대목이 있었는데, 바로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제1권 16장 “캡슐의 폭발”에서)

아가마의 전방에 위치한 에마 신의 2호기를 발진시킨 함정 두 척이 접촉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모빌 슈츠의 수에 있어서는 적이 유리했다. 이 곳을 무사히 탈출하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이전의 샤아라면 몽블랑을 방패로 삼는 작전을 실행했다. 지온군에서라면 끊임없이 소모해도 좋다는 감각이 있었다. 그것이 샤아에게 대담한 작전을 실행하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에우고는 다르다. 전력이 있는 조직이 아니다, 현재까지의 에우고의 세력은 지구 연방군 안에서도 어느 정도의 존재인지 불분명한 것이다. 이번 작전의 뒤에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이 작전을 실시하여 티탄즈에게 동요를 주어, 잠재화되어 있는 반 지구 연방 정부 분자를 선동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속셈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우고의 전력 확대도 노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척,한 기라도 손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런 전력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뛰어난 샤아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온공국 시절의 샤아 아즈나블과 에우고 시절의 크와트로 버지나를 비교하면서, 샤아 시절과 비교해 “너무나 무기력해진” 크와트로에 대해 많은 해석/변명을 해온 글을 읽었지만, 어쩌면 그런 해명성 글들 중 가장 처음 읽은 셈인 저 소설 속의 대목을 나는 가장 설득력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온 시절의 샤아는 자신감 넘치고, 거칠 것이 없는 사나이였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지온군의 승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나이기도 했다. 그런 샤아라면, 용병술을 발휘함에 있어서 상대방이 예측할 수 없는 “사석작전”을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간단한 예로 화이트베이스가 쟈브로에서 다시 지구로 나갈 때, 샤아의 옛날 부관이었던 로렌이 이끄는 무사이 함대가 샤아의 명령을 받고 화이트베이스를 저지하려다가 건담에게 모두 당해버린 뒤, 뒤늦게 도착한 샤아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하다니…” 이 말을 해석해보면, 샤아는 화이트베이스에게 로렌의 함대가 결국은 당할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예측하고도 단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화이트베이스를 막으라고 지시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보자. 에우고에서의 크와트로가, 도고스기아나 구와란의 진행을 저지하기 위해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에우고의 함대 일단을 배치시키는 모습을 상상해보자는 말이다. …별로 상상이 안된다. 에우고에서의 크와트로는 항상 신중,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크와트로의 그런 모습을 단순히 의지가 약해져서, 나이를 먹더니 소심해져서, 좋게 말해봤자 젊은 혈기가 사그라들고 신중해져서 등등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지온에서의 샤아의 위치와 에우고에서의 크와트로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말이다. (물론 이 설명으로는 백식의 라이플은 왜 그리 빗나가기만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되지 않는다 -_-;) 솔직히 별로 잃을 것이 없었던 시절의 샤아와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하는 상황의 크와트로가 동일한 용병술을 쓸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1년전쟁 당시의 화려한 샤아의 전과는(모빌슈트 파일럿이 아닌 지휘관으로서) 상당부분 그의 “과감한 용병술” 덕분이란 말이고, 그렇듯 과감한 용병술을 쓸 수 없는 환경에서의 크와트로는 날개 한 쪽 꺾인 새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된다… 어째 샤아의 화려한 전력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한 감이 들지만, 그렇게밖에 볼 수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지휘관으로서 샤아의 능력이란, 열세인 전력을 뒤집어 승세로 바꿀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