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의 화려했던 시절



관우

촉한의 무장으로 지금의 산서성 하동군 해현사람. 자는 운장(雲長). 후한말의 동란기에 탁군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평생토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조조에게 항복하여 조조로부터 귀순 종용을 받았으나 원소의 부하 안량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하였을 뿐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적벽대전때는 수군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 공략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형주에 머물러 유비의 뒤를 튼실히 받혔다. 후일 형주를 지키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공에 걸려들어 손권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으나, 송나라 이후 민간신앙으로 그를 무신 또는 재신으로 모시는 곳이 많다.

왜 관우인가?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말하길, 삼국지를 다시 보더라도 관우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하였다. 굳이 관우가 중국에서 신격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삼국지 내에서 관우가 갖는 비중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다. 유비를 멍청이로, 제갈량을 비뚤어진 천재로, 관우를 실속없는 존심만 쎈 남자로 묘사해버리면 도대체 삼국지에서 뭐가 남겠는가?

내가 지금 관우를 언급한 것은 관우를 씹기 위함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심정이고 읽는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 다만 관운장의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뭐가 아쉽냐고? 처음부터 짚어보자.

관운장의 화려했던 시절…

무엇이 관우를 삼국지 최고의 무장으로 만들었는가? 첫번째로, 마궁수(지금으로 따지면, 기병분대장 정도?)라는 직책으로 참여했던 반동탁연합군에서의 공적이 있다. 동탁의 손꼽히는 무장인 화웅을, 그것도 다른 직책 높은 장수들이 죄다 빌빌거리고 돌아오는 시점에서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나가 단칼에 베어버렸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무사인 여포와 비록 1:3의 숫적 우세상태였지만 대등한 일합을 겨뤄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리고 또 있지. 유비가 조조에게 대패하여 원소에게로 피신하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조조의 밑으로 들어갔던 때 말이다. 원소의 양팔인 안량 문추를 베어버려 조조의 중원 장악에 큰 힘을 실어줬고, 말리는 조조를 뿌리치고 오관을 돌파하며 여섯장수를 손쉽게 베어버렸다. 이 시절이 관우에게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라는데 아마 이의를 달 사람은 없겠지.

그런데 왜?

문제는, 관우의 가장 빛나는 활약이 왜 유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적이 없는가 하는 아쉬움이다. 안량 문추를 쓰러뜨려서 유비가 원소의 땅을 차지했다면 어땠을까? 화웅과 여포를 몰아내고 유비가 낙양에 입성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관우가 한창 힘을 발휘하던 시절 유비가 세력적으로 전성기를 맞지 못했다는 현실적인 면도 있지만, 그리고 제갈량이 유비의 휘하로 들어온 이후 2인자였던 관우를 견제해 관우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미비해졌다는 악의적 해석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관우의 상대적 용맹성에도 불구하고 유비라는 존재가 너무 미미했기 때문에, 관우가 유비 휘하에서는 도저히 실력을 뽐낼만한 무대가 그려지지 않았던 탓이라고 하고 싶다. 안량을 죽인 것은 정사에도 있지만 문추는 창작이고, 오관돌파조차 상당한 픽션이 가미되었다고 하지 않은가. 위의 화려했던 시절이 없다면 누가 관우를 신으로까지 섬기겠는가. 그렇지만 장비가 엄안을 계교로 사로잡고, 조운은 장판파에서 아두를 끼고 달렸고, 황충은 정군산에서 하후연을 베는 등 다른 장수들에 비해서 관우가 유비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아쉬움은 왜일까. 물론 유비 세력의 요충지였던 형주 수비에 대한 공헌도를 상당히 깎아내린 시각에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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