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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정영일

2007년 7월 27일

 

거의 1년전인 2006년 8월에 얼터너티브 스포츠웹진 후추(http://www.hoochoo.com)의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영화평론가 정영일에 대한 저의 기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번째는 누구나 기억하고 계실, <명화극장> 예고편이 나올 때마다 화면 귀퉁이에 앉아
이번 주 명화극장은 무엇입니다…라고 간단하게 소개하던 모습.

두번째는 토요일밤 인기프로그램이었던 <사랑방중계>를 원종배 아나운서와 함께 진행하던 모습.

세번째는 라디오프로그램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에 게스트로 나와
이런저런 영화 이야기와 곁다리 이야기를 소개하던 모습…입니다.


어쩌면 제 인생에서 (부모님이나 이순신 세종대왕 같은 위인을 빼고)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처음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있다면
정영일 씨가 그 사람일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존경한다는 상투적인 말보다는 닮고싶다, 정도라고 생각되지만.

<명화극장> 예고편의 경우,
소설가 최인호는 말하길 “<명화극장> 예고편에서 정영일 씨가 웃고 있으면 그 영화를 보고,
표정이 굳어있으면 그 영화를 보지 않는다”라고 했었는데,
그와 비슷한 자기 나름의 “명화극장 감별법”을 많이들 보유하고 있었죠.

우리 식구들 같은 경우는 정영일 씨의 마지막 멘트를 중요하게 생각했죠.
정영일 씨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놓치면 안될 영화, 놓치면 후회할 영화, 꼭 보셔야할 영화”라는 미사여구를 써서 마무리하면
정말 그 영화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소개하기에도 한심하다 싶은 영화가 방영될 경우에는,
“이번 주 명화극장은 000입니다”라고 짧게 마무리하곤 했죠.

무언가를 “평”한다는 사실을 정영일 씨를 통해 처음 알았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무언가를 “평”할 때 없는 말 지어서 잘 못합니다.

<사랑방중계>의 경우,
나중에 정영일 씨가 병환으로 (결국 돌아가셨고) 진행에서 빠진 이후로는 아예 그 프로그램을 안 볼 정도로
정영일 씨의 완전 팬이었었죠.
정영일 씨만의 팬이었다기 보단, 원종배-정영일-전택부 세 진행자의
밀고 땡기고 싸웠다 화해했다 하는 모습들이 재미있었던 것이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잔잔하고 따뜻한 이야기, 서민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답게
종종 정영일 씨는 “특유의 독설”로 분위기를 이끌곤 했었죠.

저는 기억이 없지만, 나중에 원종배 아나운서가 정영일 씨를 추억하며 했던 이야기 중에,
생방송인 사랑방중계에 어느날 정영일 씨가 차가 막혀서 지각을 했는데
생방송인 관계로 방송이 진행되는 도중에 자리로 들어온 정영일 씨가
상투적인 “죄송합니다”라는 말도 없이 바로 “이래서 서울시내의 교통이 문제”라며
특유의 독설을 쏟아내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군요.
그게 정영일의 캐릭터였고, 어린 나이의 제가 동경했던 모습이었다는 거죠.

<영화음악실> 같은 경우는
사실 영화보다 영화음악을 훨씬 좋아하는 이상한 타입의 인간이다보니
실제 영화는 보지도 않았으면서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줏어들은 이야기로
해당 영화에 대해 영화를 본 사람보다 더 빠삭하게 아는 기이한 놈이었었는데
(요즘도 간혹 그럴 때가 있지만)
그 정보의 원천지가 다름아닌 정영일 씨였죠.

그 프로그램에서도 특유의 독설은 여전해
언젠가 KBS가 “다시 보고싶은 영화”를 시청자 투표로 선정해 방송할 때
“<나바론 2> 같은 영화나 뽑히고 말이죠”라는 멘트를 서슴없이 날려
KBS와 시청자를 동시에 물먹이기도 했었죠.

답답한 헤어스타일에 뿔테안경, 고집스러워보이는 그 인상이 유난히 기억에 남던 분.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는 제가 유이하게 좋아하는 사람. (다른 한 사람은 이규태 씨)
요즘 영화평론가들, 정영일 씨보다 세련되고 박학다식하고 논리적일지는 몰라도
정영일 씨가 내뱉던, 폼내지 않은 한 줄의 독설이 아직도 저는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