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시절] 크리스마스 / 제설작전 / 선임하사님

우리 부대는 크리스마스때면 애인 사진 전시회니 작품 전시회니 하는 행사와 내무반별 연극 대항전을 벌이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나중에 새로 부임한 대대장이 없애버렸지만) 우리 내무반은 성냥팔이 소녀를 하기로 하고 정말, 지금 생각해도 배꼽을 잡는 극본을 하나 써가지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어쩌다가 내가 스쿠루지(성냥팔이 소녀에 왠 스쿠루지?) 영감을 맡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쨌든 나는 쫄쫄이 내복만 입고, 베개껍질을 모자대신 뒤집어쓰고 노인 역할을 했는데(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아찔하다. 군바리니까 그렇게 하고 나왔지 사회에서는 꿈도 못 꿀 노릇이다) 주연은 아니었지만 좋은 연기였다는 평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성냥팔이 소녀 역을 맡았던 채 상병과 우리가 내복에 솜을 집어넣어서 만든 마네킹(군복을 입혀놓으니 사람하고 별 차이가 없었다)이었지만 투표 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던 바람에 우리 내무반은 제일 웃겼음에도 불구하고 꼴찌를 하고 말았다.

공군은 눈이 오면 바로 실전(實戰)이나 다름없는 태세에 들어간다. 만약 우리 활주로에 눈이 쌓여서 비행기가 못 뜨는데 북한이 비행기를 띄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육군은 눈이 많이 왔다고 해봤자 아침에 일어나서 치우면 되지만 공군은 눈이 내리는 즉시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고 비상이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육군이 눈 치우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하면 그냥 웃고만다) 1994년 설연휴가 특히 잊히지 않는 것은 연휴 첫날 새벽과 마지막날 밤에 무지무지한 큰 눈이 내려서, 집에 못 간 것도 서러웠던 나는 설 연휴를 꼬박 날 새면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때 소방대에 우르르 모여서 눈이 어느 정도 그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기실 TV에서 영화 [가위손]을 하고 있었다. 잠을 못 자서 벌개진 눈으로 영화를 보고 있던 우리들은, 가위손이 마을 꼭대기의 성에서 얼음을 조각한 부스러기가 눈이 되어 날리는 장면을 보자 일제히 머리털이 곤두서는 충격을 느꼈다. 참다 못하고 중기반장이시던 이 원사님이 한마디 하셨다.
“저 새끼가 눈을 만드는 놈이란 말야?”

제대 말년에 나와 함께 근무했던 선임하사님은 우리 실원의 이름을 제대로 외우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행정계에서 실원 명단을 적어내라고 했는데 선임하사님이 적은 것을 보니 하사 박기훈(본명 박기윤) 병장 백용민(나다) 일병 양재구(본명 양재규) 이병 구원모(본명 구형모) 하는 식으로 죄다 틀리게 적혀있었다. 군바리들이 이름을 가슴에 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틀리게 외우고 계시는지 참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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