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주인공 바꾸기

미리 경고하는데 영화를 안본 사람에게는 심각한 스포일러가 널려 있으니 주의할 것!

<화차>를 영화소개프로그램에서 처음 봤을 때 느낌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었다. 이선균-김민희-조성하 정도면 연기력 되는 배우들이고(김민희가 오래전 드라마에서 똥탕질을 좀 쳤던 기억이 있어서 연기력 평가가 박한 경우가 많던데, 연기력 쭉 올려놓은 지 좀 됐다), 한 중간 토막까지 보여주는 스토리로 보건대 쓸데없는 반전 같은 것 늘어놓을 여지 별로 없어보이고, 그렇다고 너무 뻔한 스토리도 아닌 것 같고. 나중에 원작이 일본 추리소설이라는 말을 듣고(미야베 미유키는 이름만 겨우 들어본 정도지만) 원작만 너무 심하게 건드리지 않았다면 나름 깔끔한 미스테리 스릴러가 됐겠구나, 기대했었더랬다.

그래, 그런 기대는 함부로 하면 안됐던 거지. 잡지나 인터넷 등을 통해 이런저런 영화 관련 정보를 얻다가 이선균 캐릭터가 원작에선 비중이 상당히 작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상한 신호가 머릿 속에서 삐융삐융했던 걸 정확히 잡아냈어야 했던 거다. 주인공이 바뀐다는 것, 생각보다 큰 변화 아니겠나. 그것도 여주인공에게 딱히 별 감정이 없던 전직 형사가, 여주인공을 무척 사랑했고 결혼까지 할 상황이었던 남자로 바뀐다는데.

원작을 보진 못했지만, 원작 같은 구성이라면 독자와 주인공(전직 형사)이 사라진 여자에 대해서 아무런 연민이나 감정 없이 시작해 마무리될 즈음에는 수많은 감정이 뒤엉킨 상태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같은 구성으로는 “신부가 실종된 후 남겨진 신랑”이라는 극단적인 상태에서 주인공의 감정이 출발하기 때문에, 관객도 여주인공에 대해 오버된 감정을 강요받은 상태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결말이 깔끔해지기 힘들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깔끔이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 관점에서다) 반대로 이선균 역할의 비중을 높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이라면, 극 초반부터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여놓은 뒤 극 후반까지 팽팽하게 끌고 나가기에 아무래도 더 쉽다는 것 정도겠다. (이건, 감독의 역량 문제와 겹치기도 하지만) 사실상 사라진 여자랑 아무 관계도 아닌 전직 형사가 끝까지 그 여자의 정체를 파헤치는 상황을 설정하려면 아무래도 설명할 것도 많고 공감을 얻어내기도 힘들고 그러다보면 몰입도 떨어지고 뭐 그렇게 되는 법이니. 아무튼.

그래서인지 영화는 간결하고 딱딱 떨어지면서도 몰입도 충만하게 관객들 끌고 달려나간다. (영화 보면서 중간중간 러닝타임 체크하는 버릇이 있는 내가 한시간 반이 지나도록 시계를 보지 않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다가 갑자기 영화가 쭉 늘어지는게(바로 내가 시계를 본 시점), 임정혜(정희? 뭐 중요하지 않다)라는 인물이 등장하더니 이야기가 해결(혹은 파국) 국면으로 치달으면서부터 였다. 상식적으로 여기서부터 영화가 달려줘야되는데, 반대로 여기서부터 영화가 늘어진다. 왜 그렇게 됐을까?

공교롭게도, 그 시점이 바로 장문호(이선균이 연기한)가 차경선(김민희가 연기한)을 찾아 헤매던 이유와 경찰(정말 공권력)이 차경선을 찾아야할 이유가 정면 충돌하는 시점이다. 즉 사라진 신부와 살인용의자, 두 모습이 충돌하는 장면인 거다. 그순간 장문호(이선균)은 감정을 (어느 한 쪽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고, 관객들 또한 그 선택을 강요당하게 된다. 근데 뭐, 답은 정해져있지 않나. 사랑하는 애인을 법의 심판대에 스스로 세우는 그런 이야기는 영화로는 매우 적절치 않은 스토리다. 거기서부터, 이미 뻔하게 보이는 결말을 향해 장문호는 달려가고, 그 지점에서 차경선과 부딪히고, 결국 애매하게 헤어져버렸던 거다. 두 사람이 만난 에스컬레이터 씬에서 어떻게든 감정이 폭발하고, 그게 해결되고, 그 상태로 영화가 마무리되었다면 좀더 깔끔했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기엔 장문호의 감정이나 관객들의 감정이 너무 복잡해져있다보니, 결말을 그 다음 상황으로 미룰 수밖에 없어지고, 그러다보니 영화가 늘어져버리고 만 거다.

차경선이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게 만들었던 과거, 그 과거에 대해 너무 축약적으로 설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다 이혼, 거기까지는 대충 공감하며 따라가겠는데, 그 다음 마산으로 도망쳐와서 다시 서울, 그 뒷부분 이렇게는 너무 휙휙 넘어간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이건 내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는게 바로 옆에서 본 마누라는 별로 그렇게 안느꼈다니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장문호의 비중이 커지면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원래대로라면, 그런 과거를 캐내고 동시에 그녀의 범죄혐의를 추적하면서 전직 형사(원래 주인공)가 차경선에게 복잡미묘한 감정을 갖게 되는게 맞다. 즉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이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내몰려버린 한 인간에 대한 연민, 뭐 이런 감정. 하지만 장문호 입장에선 이미 사랑했던 여자에게 새삼 과거를 들춰서 연민이나 느끼고 뭐 그런 건덕지가 뭐가 있겠나. 애초에 사라진 약혼녀를 만나서(이미 결혼도 깨진 마당에) 정말 묻고 싶었던 것, 그건 “왜 그랬니?”도 아니고 “너 정말 사람을 죽였니?”도 아니고 마지막에 툭 던진 그 한 마디, “나를 사랑했었니?”가 가장 중요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구구절절한 스토리는 그냥 장문호 머리만 복잡하게 만드는 장치밖에 되지 않는 거였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다보니 영화 마지막에 장문호와 차경선이 만나는 장면이 꼭 필요했을 거고, (그 장면이 없었다면 영화 막판에 엄청 뜬금없고 심심하게 끝났을 거다) 만나놓고 그냥 끝내자니 애매해서, 경찰 총출동하고 용산역 뒤집어놓고 확실하게 결말을 낼 수밖에 없어졌다고 보는 거다.

정리하면, 애시당초 장문호 역할의 비중을 올린 이유가 솔직히 궁금하다. 그냥 내 생각엔, 감독이 원작을 보다가 흐지부지 비중 없어지는 약혼남의 존재에 좀 심하게 감정이입해서, 한국 여자들 좋아하는 “사랑에 목숨거는 남자”로 주인공 재설정해서 시나리오 써보다가, 막상 바꿔보니 스토리 끌고가다가 마무리짓기가 영 애매해서 수십번 고쳐쓰다가 나온 게 이 상태가 아닌가 싶다. 애시당초 가기 힘든 길을 무리해서 가다가, 그나마 최적의 시나리오로 뽑아낸 게 이 정도, 뭐 그런 느낌이란 얘기다.

그래도 영화가 막판에 늘어지다가 신파 냄새 좀 풍기면서 끝난 거 제외하면,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이선균 조성하보단 김민희) 몰입도 좋고 상황 굴려가는 연출도 좋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막판 연출도 쭉 달려오던 탄력에 비해 맥이 풀려서 그렇지, 그런 식의 결말을 원했던 관객들도(정말 김민희가 이선균을 사랑하긴 했는지 궁금했던) 있었을테니 결말 자체가 나빴다 라고 보기도 좀 그렇고. 다만 내가 원하는 미스테리 스릴러는, 좀더 감정 자제하고 날이 선 칼처럼 차갑게 다가가는 그런 것이었는데, 감정 펑펑 터지는 멜로영화를 보고 나온 것 같아서 아쉽다는 얘기였다.

PS. 일본에서 2시간짜리 드라마로 만든 게 있다던데 한 번 구해서 보고 싶어졌다. 그거 보고나면 원작소설도 보고 싶어질지도.

PPS. 최근엔 영화를 봐도 별로 홈페이지에 리뷰 같은 거 올리고 그러지 못했는데, 간만에 영화 보고 하고싶은 말이 좀 생겨서 끄적이다 보니 예전에 본 영화들도 정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불뚝불뚝 생겨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주 안에 급하게 처리할 일이 많이 쌓여있다보니 그런 듯.-_-;; 이번 주 안에 글을 써대지 못한다면 아마 다시 기회를 얻기 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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