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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 – 그는 조연일 수밖에 없는가

1999년 8월 7일



방통

유비 막하의 모사. 본시 수경선생 사마휘가 말하길 와룡, 봉추 중의 하나만 얻어도 왕업을 이루리라고 하던 봉추가 곧 그다. 양양 사람으로 자는 사원. 적벽대전에서 연환계를 성공시켜 큰 공을 세웠지만 그의 생김새가 들창코에 얼굴은 검고 수염은 적어 도무지 의젓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손권은 그를 중용할 줄 몰랐다. 노숙이 유비에게 천거하여 비로소 중용되었으나 서천 공략시 군사로 참가하던 중 아깝게도 낙성을 치다가 난전에 맞아 죽으니 때에 나이 겨우 36세였다. 그 고개 이름이 낙봉파였기 때문에 본인도 후세 사람도 이를 지참(地讖)이라고 하였다.

이상은 방통에 대한 간단한 소개 글이다. (어문각판 삼국지에서 참조) 수경선생이라는 사람에 따르면 제갈량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기재임이 틀림없지만 일찍 전사한 탓인지 별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 편이다. 내용상으로는 서서처럼 제갈량의 등장을 위한 하나의 조역 역할이 더 두드러질 뿐, 실제로 그가 유비를 위해서 한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아보인다. 그렇다면 방통은 때를 잘못 만난 운없는 서생에 불과한 것인가.

방통에 대한 사소한 말들

삼국지 내에서 방통이 등장하는 것은 적벽대전이 처음이다. 여기서 그는 조조의 군선들을 화공하기 위해 조조의 진영에 침투하여 조조의 배들을 모조리 쇠사슬로 연결시키는 연환계를 성공하고 유유히 사라져버린다. 삼국지 속에서 방통이 전쟁으로 공을 세우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며, 또 삼국지 전체의 판도를 바꿔놓는 큰 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정사에는 이러한 대목이 없다고 한다. 즉 방통의 연환계란 후세사람들의 입으로 회자된 확인되지 않은 전설에 불과하거나 지은이의 창작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방통은 실제로는 삼국시대에 쓸만한 족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봉추라는 허명만 남겼었다는 결론이 된다. 지은이가 이름에 비해 너무 내세울 공이 없는 방통을 위해 연환계를 창작해넣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높게 평가해 이런 전설을 창작해냈는지, 아니면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방통이 삼국지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

여하튼 방통이 유비의 막하로 들어가게 되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방통을 높게 평가하게 된 유비가 서촉을 공략하기 위해 들어가면서 그를 군사로 삼았다. 그러나 방통이 전사하면서 근거지인 형주를 지키던 제갈량이 급히 서촉으로 들어가고, 제갈량에 의해 유비군은 연승을 하며 촉한 건국의 토대를 쌓게 된다.

뭐 이야기 상으로 방통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방통이 굳이 없었어도 제갈량이 있었으니 유비는 서촉을 점령하였을 것이며, 결국 잠깐의 공을 세운 뒤 제갈량을 천거하고 떠나버린 서서처럼 제갈량의 존재가치를 빛나게 하는 하나의 조역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않다. 잘 살펴보자.

유비는 서촉으로 진출하면서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 등 오래 고락을 같이 한 (제갈량이 비교적 최근에 가담하긴 했지만 그 신뢰도는 뒤의 세사람 못지 않았다) 부하들을 제외하고 방통, 위연, 황충 등의 부하들만 데려갔다. 나중에는 익주(서촉)가 유비의 근거지가 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유비의 근거지는 형주였고 유비도 제갈량도 형주를 지키는 쪽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었지 익주를 새로 얻는 쪽에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방통이 죽고나자 제갈량과 장비, 조운까지 모두 빠져나가 익주로 들어가고 형주는 관우 혼자 지키다가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방통의 죽음은 그냥 장수 한 명의 죽음이 아니다. 방통을 잃음으로써 유비는 익주-형주로 이어질 천하삼분책의 중요연결고리를 잃은 셈이 되었고, 자신의 근거지를 충돌이 잦은 형주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익주로 완전히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실상 천하통일의 꿈을 접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았다. 살아서는 적벽대전의 연환계로 삼국의 판도를 뒤흔들었고, 죽어서는 형주를 잃는 계기를 만들어줌으로써 다시 삼국의 판도를 뒤흔들어버린 방통만큼 삼국지 속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캐릭터는 흔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