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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왕벌의 비행

2000년 7월 2일

영화음악을 즐겨듣는 사람으로 음악이 돋보이는 영화를 만나는 일은 참으로 반갑다. 물론 음악밖에 들을 게 없는 영화를 보는 일은 또 하나의 고역일 경우가 많지만… 음악이 있고, 드라마가 있고, 또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가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톰 헐스와 F. 머레이 에이브러햄의 연기가 돋보인 <아마데우스>나, 제프리 러쉬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샤인>의 경우가 그랬다.

솔직히 데이빗 헬프갓이라는 피아니스트…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누구인지 관심없다. 하지만 영화는 참 괜찮았다. 피아니스트의 영화다보니 피아노곡이 현란하게 흐르는 것도 괜찮고, 싸이코틱한 주인공의 모습도 역시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인 취향이, 정신적으로 건강해보이는 사람은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맘에 들었던 것은 주인공이 어느 카페(술집인가?)에 앉아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을 연주하는 장면이었다.

사실 영화 <샤인>을 보기 전에 아카데미 시상식을 먼저 보았다. 이미 남우주연상 수상이 유력한 (다른 부문도 후보에는 올랐지만 주요부문 중에 수상이 유력한 것은 없었다) <샤인>이다보니 아카데미 시상식 주최측에서도 재밌는 이벤트를 하나 집어넣어주었다. 바로 이 영화의 실제 모델인 데이빗 헬프갓이 무대에 올라 바로 이 “왕벌의 비행”을 연주한 것이다.

그의 연주를 처음 보면서 느낀 점은 정말 “현란하다”는 것이었고, 제목이 왜 “왕벌의 비행”인지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왕벌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미지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가. 마치 “아기코끼리 걸음마”를 들으면 뒤뚱거리며 엄마를 쫓아가는 아기코끼리가 연상되듯이.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았는지 조금은 맛이 가보이는(?) 데이빗 헬프갓은 그렇게 연주를 끝냈다. 그리고 영화에서 다시 제프리 러쉬의 연주로 (그가 실제로 연주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왕벌의 비행”을 들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새롭게 느낀 점이 있었는데, 바로 “정신병에 걸린 천재의 모습”이 바로 그 음악에 적절히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피아노에는 문외한이긴 하지만 그 현란한 속도로 봤을 때 “왕벌의 비행”은 어지간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면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곡일 것이다. (테크닉보다는 속도면에서) 동시에 그 현란한 빠름이 어딘가 불안정한 정신상태의 묘사로는 너무나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초라한 모습에 담배까지 문 제프리 러쉬가 초라한 가게에서 연주하는 이 곡은, 그러나 내가 이런데서 연주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대단한 피아니스트라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듯 열정적으로 연주된다. 그러나 그 현란한 속주에 감탄하는 한편으로는 그렇게 연주에 몰입해있는 제프리 러쉬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음악으로 “왕벌의 비행”은 너무나 적절하다. 그래서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오른 데이빗 헬프갓도 아직 정신병이 덜 나아보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