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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로 레이의 변신

2000년 1월 13일

건담의 첫 조종사. 최초의 뉴타입. 역대 최강의 건담 파일럿. 지구를 지키기 위해 샤아와 함께 장렬히 산화.

누구의 이야기일까. 너무나 쉬운 문제다. “아무로 레이”. 그의 아버지는 연방군의 뎀 레이 대위로 건담 개발에 참여하였으나 샤아의 부하 데님과 진이 싸이드 7을 공격했을 때 우주로 튕겨나가 실종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지구에 남아있으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아무로 레이는 15세때 우연히 건담에 탑승했다가 건담의 정규 파일럿이 전사하는 바람에 “당분간” 건담을 맡게 되었다. 자신의 능력보다는 건담의 성능에 힘입어 집요하게 따라붙는 샤아와 란바랄을 따돌릴 수 있었지만, 거듭되는 전쟁 속에서 뉴타입으로 자각하게 되면서 이제는 건담의 성능이 아무로의 능력을 따라오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1년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아바오아쿠 전투에서 마그넷 코팅으로 반응속도가 빨라지는 정도의 업그레이드에 그친 건담을 몰고나갔으나 80%밖에 완성되지 않은 지온그와 붙어 무승부를 이루었다. 지구로 돌아가서는 뉴타입에 대한 연방의 특별대우로 인해 군사고문이라는 허울만 쓰고 감시를 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탈출하여 에우고의 지구동조세력인 카라바에 들어갔다. 7년간의 공백기간과 우주에 대한 알지못할 거부감으로 인해 활동영역이 지구권으로 한정되지만 카라바 내에서는 나름대로 활약했다. 샤아가 네오지온의 총수가 되어 다시 나타났을 때 론드벨의 일원으로 그에 맞섰고, 샤아의 액시즈 낙하작전을 막아내고 샤아와 함께 산화했다.

이상 간단하게 아무로의 약력을 적어보았다.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동전사 건담>이라는 작품 속에서 주인공 캐릭터 아무로의 첫등장은 다른 로봇물의 주인공 캐릭터의 등장에 비해서 그다지 획기적인 면이 없었다. 우선 로봇을 개발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슈퍼로봇물 속의 정형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우연히 로봇에 탑승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등장 이후 흔히 말하는 “리얼로봇물”로 가는 작은 포석이 발견되는데, 건담의 성능이 너무 뛰어나다는 전제를 줌으로써 지온군 최고의 에이스라는 샤아 아즈나블의 자쿠가 애송이 소년을 이기지 못하는 현실에 당위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다른 슈퍼로봇물이었다면 주인공인 아무로가 초능력자라거나, 특별한 훈련을 거쳤거나, 건담이라는 로봇에게 절대로 질 수 없는 필살기(꼭 마지막 절박한 순간에만 쓸 수 있는)를 부여해주거나 했을텐데 그런 것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물론 차후 아무로가 “뉴타입”이라는 일종의 초능력자로 각성하기는 한다. 하지만 같은 뉴타입인 라라아가 등장하고, 역시 뉴타입의 가능성을 가진 샤아가 존재하기 때문에 뉴타입으로서 전투적 우월성은 다른 로봇물의 주인공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고, 그 “뉴타입”으로의 각성 과정이 상당히 스토리가 진행된 다음부터라는 점에도 다시 주목해야한다. 뉴타입 – 또는 초능력자로서의 아무로의 모습은 10화 쯤에서부터 발견되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암시적일 따름이고, 19화에서 란바랄의 그프를 쓰러뜨렸을 때까지만 해도 란바랄은 “너는 건담의 성능 덕분에 이겼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무로가 이전 슈퍼로봇물의 주인공과 달랐던 점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한 부정이었다. 우연찮게 건담에 타게 됐지만 눈에 띄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건담이라는 로봇의 성능에 의존하여 전과를 올리고 있는 주제에 자기가 건담을 몰고 지온군과 싸워야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계속 불만을 토로했던 것이다.
“모빌슈트를 타고 싸우는 내 자신이 더욱 나답지 않아” “이젠 무서운 건 싫어” “그렇게 건담을 움직이고 싶으면 당신이 하면 되잖아” 비록 지쳐있는 상태에서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대사들이긴 하지만 이때까지의 로봇만화 주인공들과는 격이 다른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쟈브로에 입항한 뒤 군속에서 해제되지 않고 오히려 정식 군인으로 발령이 나자 어두운 표정을 짓기까지 한다. 아무로는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끌려들어갔고, 나름대로 건담의 파일럿으로서 새로운 전술 개발과 샤아나 란바랄 등과의 경쟁심에 따른 자기 발전을 이룩해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지구를 지키는 용사로서의 사명감”에 불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동전사 Z건담>에서의 아무로의 모습은 설득력이 강하다. 지구를 위해 싫건 좋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일반인과의 격리와 허울좋은 감금생활 뿐이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7년간 지내온 아무로는 왕년의 명파일럿이라는 명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고, 자신이 죽인 라라아의 영혼이 떠돌고 있는 우주로의 귀환을 두려워했다. 그러했기에 화이트 베이스의 전 승무원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감금 중이던 샤이안 기지를 탈출하여 카라바에 가담했을 때 그가 새로 총부리를 겨눈 곳은 바로 자신이 몸을 담고 있었던 지구연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얘기를 할라고 너무 길게 끌고 왔는데… <샤아의 역습>에 등장한 아무로 레이는, 몇 년의 공백을 거치면서 옛날 건담의 파일럿다운 위용을 너무나 완벽하게 갖춘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과거 전쟁에 대한 회의와 자신을 전쟁의 도구로 활용했던 연방정부의 군국주의에 반기를 들던 모습과는 다른, 이제는 자신의 출신성분(아무로 레이는 스페이스노이드가 아니라 어스노이드 – 지구출신이다)까지 확실하게 자각하여 한때나마 같은 편이었던 스페이스노이드들을 반연방단체로 몰아 탄압하는 특수부대요원이 되어있었다. 물론 그런 그에게 맞설만큼 사악해진 샤아 아즈나블까지 셋트 메뉴로.

<기동전사 Z건담>이 삐딱해져버린 이후 토미노 요시유키 이하 건담의 제작진들은 괴상하게 꼬여버린 건담 시리즈를 바로잡기(?) 위해 한때 폐인 비슷한 단계까지 전락했던 아무로를 연방 최고의 파일럿으로 승격시키고, 지온의 이상을 이어받으며 스페이스노이드의 권익을 위해 싸우던 샤아 아즈나블을 파렴치한으로 전락시키는 모험을 단행했다. 결과는, 아무로 팬들로부터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샤아 팬들로부터는 외면을 당했다. <샤아의 역습>이 극명하게 찬반으로 갈린 이유는 단지 이것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