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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 보기

2009년 9월 30일

본 <TV이야기> 꼭지에 글을 쓴 지가 무려 2년이 훌쩍 넘었다. 요즘 각종 메타블로그 사이트들을 돌아다녀보면 인기있는 TV프로그램을 시청한 후에 벼라별 쓸데없는 이야기를 뭔가 있는 척 늘어놓는 소위 “연예 전문 블로그”들이 아주 대세를 이루고 있는데, 그런 시덥잖은 분위기에 편승하기 싫다는 생각은 분명히 있지만 딱히 그런 것 때문에 글을 쓰지 않은 것도 아닌 것 같더라. 그래서, 요즘 대체 내가 TV로 뭘 보고 있나 가만히 돌이켜보는 시간을 잠시 가져보려고 한다.

예전에, 아니 불과 3~4년전만 해도 나는 TV를 상당히 오래/자주/많이 보는 인간이었다. 장르도 가리는 편이 아니라서 3개 방송국의 월화/수목/주말 드라마의 제목/출연진/시놉시스를 거의 다 외우고 있었고, 보통 밤 11시대에 편성되는 심야오락프로그램도 요일별로 다 꿰고 있었다. 주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주중이건 주말이건 약속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보니) 생각해보니 지금도 프로그램 제목/출연진/시놉시스 등등을 외우고 다니는 건 변함이 없는 거 같은데 그건 그냥 인터넷 기사 찾아보다보니 외워진 거고 드라마나 방송을 직접 보고 아는 건 별로 없다. 결정적으로 최근 특히 관심이 뜸해진 가요프로그램이나 코미디프로그램은 언제 방송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개그야>는 최근에 종영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아 이걸 그동안 토요일에 방송했구나, 그랬을 정도)

그럼 요즘은 뭘 시청하시나? 드라마는 정말 <선덕여왕>하고 <솔약국집 아들들> 밖에 보지 않는다. 얼마 전 종영한 <찬란한 유산>은 마누라가 열심히 보길래 그 시간에 인터넷질-_-을 하다가 끝날 때만 조금 봤고. 버라이어티도 <무한도전>하고 <1박2일>만 그나마 챙겨보지 <패밀리가 떴다>나 <일요일 일요일밤에>의 숱한 코너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참고로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는 사촌여동생은 현재 <일밤>의 모 코너에서 고생 직싸게 하는 중) 결혼 전에는 퀴즈프로그램에 이상열광하시는 어머니 덕분에 <우리말 겨루기>와 <퀴즈 대한민국>의 열성시청자였지만 결혼 후에는 퀴즈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누라 덕분에 그것도 끊었다. 그 대신 <전국노래자랑>을 고수하시는 아버지와의 채널 쟁탈전이 끝난 덕분에 <출발! 비디오여행>을 줄곧 시청하게 된 것은 물론 KBS 2TV의 <영화가 좋다>, SBS의 <접속 무비월드>, EBS의 <시네마천국>까지 영화정보 프로그램은 줄줄 꿰고 있다. 주중 오락프로는 월요일 <놀러와>, 화요일 볼 거 없고, 수요일 <황금어장>, 목요일 <해피 투게더>, 금요일 역시 볼 거 없고. 이런 식인데 볼 거 없는 날은 KBS 1TV의 11시뉴스를 멍하니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요즘 드라마는 시청률 높은 <선덕여왕>, <솔약국집 아들들> 외에는 보는 거 없고, 오락프로그램도 시청률 잘 나오는 몇몇 프로(유재석 강호동 나오는)만 챙겨 보고, 영화 관련 프로그램 조금 열심히 찾아보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남들 다 보는 것만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씀. 별로 시청률이 높지 않은 프로그램에 매니아가 되곤 하시는 어머니와 같이 살지 않게 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덕분에 KBS 1TV 일일드라마는 보지 않아도 되지만)

리모콘을 돌리고 있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TV 프로그램 때문에 내가 제약을 받고 있다는 생각. 과거 인기있던 모 드라마 때문에 직장인들 퇴근시간이 빨라졌다거나, 모 드라마가 방송하는 시간에는 이웃집에 전화도 걸면 안된다거나, 모 드라마가 방송되는 시간에 술집 매상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그런 정도의 거창함은 아니더라도,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생긴다는 사실 자체가 내 행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를테면 <선덕여왕>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에서 큰 볼일을 미리 보고 온다거나, 주말에 마트 갔다가도 왠만하면 <무한도전>이나 <1박2일> 하기 전에 들어온다거나 뭐 그런 상황들. 가끔은 한창 재밌게 읽던 책을 덮어야 할 때도 있고, 가끔은 야근거리를 집에 들고 왔다가도 손도 못대보고 도로 싸들고 가야할 때도 생기는 거다. (어머니의 예를 들자면 드라마 보고 설겆이 해야지… 이런 경우도) 이른바 “본방사수”의 폐해라고 할까.

너무 심하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마치 내가 “TV프로그램을 보려고 사는 것 같은” 그런 묘한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아 오늘이 수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인식하곤 했는데, 요즘은 오늘이 수요일이니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구나 이렇게 바뀌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까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별로 애정도 없고 소위 “연예 전문 블로거”들처럼 분석/비평할 생각도 없으면서, 시간 맞춰서 TV 앞에 각잡고 앉는 건 그냥 시간때우기일 뿐이라는 거다. 어찌 보면, 예전엔 집에 들어와서도 그냥 쉰다기 보단 뭔가 왕성한 체력으로 일을 벌려놓곤 했는데, 요즘은 집에 오면 그냥 넋놓고 쉬는 게 우선이 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TV 보는 것 외에는 딱히 집에서 할만한 재미있는 일도 없고, 그렇게 뭔가를 할 정력도 부족한 것 같고. 나이를 조금이라도 더 먹어서 그런 건가, 결혼생활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내가 요즘 유난히 힘이 들어서 그런 걸까.

그래도 내일모레면 추석연휴인데 TV에서 뭐 재미있는 프로그램 하는지 찾아는 봐야겠다. 정말 그거 말고 뭐 낙이 있어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