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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 그리고 삼국지 (2)

2000년 10월 16일

먼저 1편을 쓴지 10개월만에 2편을 올리게 된 점에 대해서 사과를 드린다.
변명하자면 옛날에 써놨는데, 텍스트 파일을 어디다 저장해놨는지 잊어버려서 다시 쓸 기분은 안나고, 파일만 찾으면 올린다 올린다 하다가 오늘 우연히 찾아서 올리는 것이다.

‘신장의 야망’이란 게임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노부나가의 야망’인데 ‘신장의 야망’ 또는 ‘노부나가’ 이런 식으로 불리고 있다.
나는 관심이 없어서 게임을 해보지 않았으나 고에이사의 ‘삼국지’와 비슷한 게임으로 알고 있다. (‘신장의 야망’도 고에이사의 게임이다)
‘삼국지’가 삼국 통일을 그리고 있듯이 ‘신장의 야망’도 일본 전국시대의 통일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다 노부나가, 하시바 히데요시, 도꾸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이 활약했던 이 시기는 일본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흥미진진한 부분으로, 일본 역사소설은 거의 이 시기를 다루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시기를 다룬 소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이 ‘도꾸가와 이에야스’, 일명 ‘대망’이라는 소설이다. 일본의 삼국지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엄청난 스케일과 무수히 많은 등장인물로 독자들을 압도하려 한다. (하려한다~라고 썼다) 분량만 놓고 봐도 삼국지 번역본은 보통 10권 내외인데 ‘대망’ 번역본은 20권짜리다. 시간적 배경은 거의 비슷한데도… (대망이 한 2~30년 짧을게다)
삼국지 게임의 기본 플롯조차 ‘대망’의 기본 구도에서 따올 정도인 걸로 봐서 (정확히 말하면 ‘대망’의 기본 구도를 기초삼아 ‘신장의 야망’이 나오고, 다시 ‘신장의 야망’을 토대로 ‘삼국지’를 만들어낸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대망’에 대해서 “삼국지 못지않은…” 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나마 ‘대망’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 역사적 상황의 흥미진진함 때문이었지, 소설의 내용이 나를 빨아들여서가 아니었다. 번역이 잘못 된 탓일 거라고? 문체를 얘기하고 있는게 아니다 지금. 작가의 기본적인 스토리텔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는 중국에서 나온 작품이라 그런지 몰라도 분위기가 매우 대륙적이다. 등장인물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개념이 지배적이고 그렇지 못한 장수들은 대개 쫄딱 망한다. 그런데 ‘대망’을 수놓고 있는 영웅(…?)들은 미안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국을 제패하지 못하고 스러져갔다고 작가가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내가 둘러보기에 가장 장수다운 장수는 과격하게 묘사된 오다 노부나가뿐이며… 너구리 같은 도꾸가와 이에야스도 조금… 그외 나머지들은 별루다. 사실상 전국을 제패한 하시바 히데요시조차 자기 자식의 안위 때문에 조카를 죽이지 않나…
그러다보니 ‘대망’의 장수들은 쫀쫀하다. 오다 노부나가 빼고…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들은 사고가 복잡하지 않은데 ‘대망’ 속의 일본 장수들은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삼국지가 ‘전쟁의 역사’라면 대망은 ‘술수의 역사’다. 오고가는 여자들은 헷갈려서 소속이 불분명하고, 동맹과 대결은 수없이 거듭되지만 그때마다 구실도 많고 명분도 많다. 유비와 손권이 동맹을 맺을 때는 이유가 간단했다. 조조를 이기려면 둘이 힘을 합쳐야했으니까… 그러나 대망에서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도를 버리고 오다 노부나가를 택하는 장면을 보면… 상식적으로 힘의 논리를 따라갔다고 독자들이 판단을 하는 상황에서 이런저런 구실을 있는대로 가져다 붙인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을 무지하게 복잡하게 설명하는 방식… ‘대망’ 속에서 지겹게 되풀이된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패배에 몰리자 이에야스를 돕기위해 자신이 반기를 들었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지껄이는 장면에서는 진짜 뒤로 넘어가고 싶을 정도로…

한마디로 ‘대망’ 속의 장수들은 ‘나쁜 놈’이 없다. 삼국지에서 동탁, 원술처럼 무조건 욕만 먹는 장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조도 부하를 사랑하는 모습과 부하를 매몰차게 내치는 두 모습을 보여주며, 유비도 선하게만 보여지지만 가끔은 치사하고 멍청한 짓도 한다. 손책에게는 불같은 성격을, 여포에게는 멍청함을, 관운장에게는 지나친 자부심, 장비에게는 과격함, 마등에게는 경솔함, 사마의에게는 배신, 제갈량에게는 완벽주의자라는 단점을 주었기 때문에 삼국지 속의 장수들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망’에 나오는 장수들은 겉으로만 부드럽고 과격하고 차이가 날 뿐 속으로는 똑같다. 모두 충성스러운 부하들이며 누가 전국을 제패하건 말없이 따르겠다는 의지에 불타고 있다. 말이 되는가? 강한 세력의 상대방에게 맞섰다가 결국 지게 되면 나의 희생으로 전국 통일이 한걸음 다가섰다고 말한다. 주군을 버리고 항복하면서도 이것으로 우리편(항복하기 전에 우리편)의 내분을 잠재우고 결속을 다지게 되었으니 나는 진정으로 주군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항복한 동료를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다른 동료도 그 동료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자기가 미리 설쳐서 뒷탈을 없애주었다고 말한다. 미쳐버릴 지경이다. 행동마다마다 표면과 다른 속셈을 보여준다. 일본사람들은 겉모습과 다른 속마음을 갖고 있다더니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속마음이 이렇게 하나같이 충성스러움으로 대변되지만 않는다면야 참아볼만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