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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 사거리에서

2009년 5월 29일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하는 날.
점심 때 직원 일부는 시청에 노제 직접 보러 간다고 출발.
같이 갈까 하다가 못가는 사람들하고 그냥 점심식사.

2시쯤 되니까 노제에 갔던 사람들 중 “일부”가 돌아왔는데
(가자마자 인파에 뿔뿔이 흩어졌는데 전화도 안통한다고 함)
잘하면 지금 우리가 있는 삼각지역 쪽으로 운구행렬이 지나갈 것 같다고.
따져보니 서울역에서 큰길 따라 오다보면 바로 삼각지역이긴 함.
거기서 전쟁기념관쪽으로 빠져서 고속도로 탈 확률이 높지.
잘하면 시청-서울역까지 안가도 운구행렬 구경은 하겠다 싶었음.

인터넷을 보니 3시쯤엔가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속보가 뜨길래
(또 서울역에서부터는 시민들과 함께 이동하지 않고 제 속도로 달린다기에)
서울역에서 정리 좀 하고 출발하면 지금쯤이지 않을까, 싶어서
3시반쯤 은행에서 볼 일도 볼 겸 밖으로 나왔음.

마침 은행에서 돈 좀 찾고 밖으로 나오는데
난데없이 경찰(전/의경 말고)들이 우르르 뛰어가는 모습 포착.
오 타이밍이 딱 맞았나보다.
군말없이 경찰들 뒤를 따라서 삼각지 사거리 쪽으로 갔음.

가보니 이미 사거리에는 운구행렬을 구경하려는 주위 사람들이 제법 있음.
경찰들은 도로에 내려서서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고.
뭐 금방 지나가겠지 싶어서 나도 사람들과 함께 기다렸음.

30분 경과.

숙대 방향 도로쪽에 뭔가가 어른어른하더니
일제히 나타난 무리들은 운구차량 행렬이 아니라 노란 풍선/모자/손수건을 손에손에 든 사람떼거리.
어머나 저 사람들 서울역에서부터 걸어왔나봐.
서울역에서부터는 사람들 빼고 차량 이동한다더니
저렇게 사람들이 들러붙어있으니 차가 늦게 오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몰려온 수백명의 사람들이 도로 삼각지 사거리에 자리잡고 운구행렬을 기다리는데도
운구차량은 나타날 생각을 안함.

다시 30분 경과.

또 숙대쪽 도로에 뭐가 어른어른하더니
이번엔 만장을 든 사람떼거리가 등장.
가만 보니 삼각지에서 숙대입구에 이르는 도로는 완전히 서울역에서부터 몰려온 사람들로 점령되다시피 한 상태.
이래가지고는 차량이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았음.

기다린 노력이 불쌍해서라도 운구차량은 보고 가야겠다는 오기 발동.

다시 30분 경과.

이미 주위에는 삼각지 인근 주민 + 서울역에서 온 시민들 포함해서 엄청난 인파가 몰린 상황.
그 많은 사람들이 각각 DMB나 전화를 통해 운구차량이 어디에 있는지 동태 파악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수원 화장장에 도착했다느니,
3시반에 대우빌딩 앞에 있다가 4시에 숙대까지 겨우 왔다느니,
길이 막혀서 남영역에서 돌아온다느니,
온갖 설이 난무하기 시작.

게다가 갑자기 숙대쪽 도로를 꽉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싹 사라져버리고
그때까지 차량 통행이 전혀 안되던 그 도로에 SBS 중계차와 물대포차-_-가 나타났음.
진압 들어간 건가?
아니나다를까 주위에 있던 경찰 싸이카 무전기에서 “진압됐어, 진압됐고…”라는 육성도 들려오고.

마침 지나가던 할머니가 “아 여기로 안온대요~ XXX로 돌아서 벌써 가버렸대~”라고 외치자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더니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
어 정말 지나갔나? 싶어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내 옆에 있던 젊은 남자 둘이 “돌아갈 곳이 없다, 꼭 이리로 온다”는 내용의 대화를 열심히 나누는 걸 옅듣고
그래 좀더 기다려보자, 하고 버텼음.

과연, 잠시후 첨단디지털기기의 도움으로 정보를 입수한 사람들이
운구차량이 용산구청쪽으로 돌아서 삼각지 사거리를 통과한다며 다시 모여들고
숙대방향에서 올줄 알고 그쪽 도로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일부는 용산구청방향으로 옮겨서 다시 기다리기 시작.

그러더니 갑자기 전쟁기념관 방향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싸이카들이
용산구청 방향 고가도로쪽으로 일제히 달려가버리고
전경버스 여러 대가 역시 같은 방향으로 질주하더니
고가도로 앞에서 전경 1개대대를 내려놓고
전경들이 방패들고 고가도로로 뛰어올라가는 모습이 펼쳐졌음.

주위 사람들은 따라오는 사람들을 해산시키려나보다, 금방 오겠네, 하며 수근수근.
내 옆에 있던 아저씨가 누군가와 전화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공주에서 올라왔는데 대통령님 마지막 가시는 길 배웅하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아저씨들 말고도 노란모자 쓴 할아버지 할머니에 애기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에 몰카 찍히기 딱 좋게 야한 옷 입은 처자들까지
사람 정말 많더만.

아무튼 그렇게 십몇분 더 기다렸더니
전경들이 다시 고가도로를 통해 내려오는 모습이 나오고
물대포차 철수하고 주변 정리하고
숙대방향에서 “노사모/봉하마을”이라고 쓴 관광버스가 지나가다가
모여있는 우리들을 보고 손을 흔들길래 몇몇이 같이 흔들어주고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사거리 신호등이 다 꺼져버림.

사람들이 “왔다, 왔다”하는 순간 고가도로를 통해 운구차량이 나타나고
막히는 게 없다보니 정상속도로 휙 달려나가버려서 사람들이 손흔들랴 인사하랴 사진찍느랴 정신이 없었음.
나도 폰카로 얼른 한장 찍었는데 앞에 영정차량만 찍히고 뒤에 운구차량은 대가리만 조금 나왔음.

아무튼 사람들이 손흔들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외쳐부르는 사이 운구행렬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시계를 보니 벌써 5시반.
우르르 달려가는 경찰들에 낚여서 무려 2시간을 기다린 셈.

나중에 뉴스를 들어보니 일부 시민들이 운구차량을 막고 못가게 해서 삼각지 앞에서 계속 정체됐었다고.
차라리 서울역을 갔다오는 시간이 더 짧았겠구먼.

어쨌거나 운구차량 직접 보고나니 뭔가 숙제 하나 해치운 기분이랄까.
가뜩이나 아침에 조기게양이라도 할까 싶었다가 아직 집에 태극기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만 좌절-_-했었는데
그런 미안함을 좀 덜었다고 하면 너무 오바일려나.

분향소도 한번 못가봤는데 아마 49제 기간동안에는 유지할 모양.
일부러 찾아가볼 위인은 못되고 근처를 지나갈 일 생기면 헌화라도 하고 올까 싶다.

뉴스 보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 엉엉 우는 거 보고 더 짠해진
시대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