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한창이다. 개인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솔직히 우리나라의 올림픽 열기에는 조금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4년동안 땀을 흘려 메달에 도전하는 것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월드컵도 그런 면이 있지만 올림픽은 어딘가 모르게 국가들간의 대항전이라는 성격이 강해서, 특히 냉전시대를 지내오면서 미국-소련-동독 같은 나라들의 알듯 모를듯한 힘겨루기가 눈에 띄게 횡행하는 부분이 있었다. 80년대에 올림픽 순위경쟁을 가만히 보면, 체제의 우위를 스포츠로 증명받으려는 이상심리들이 있는지 공산권 국가와 공산권과 대립하고 있는 나라(미국, 서독, 한국 등)들이 이상하게 올림픽 메달순위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올림픽에서 메달 많이 따면 국가적으로 무슨 실익이 있다거나 (단순히 외교적인 것일 뿐이라도)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관계로, 결국 자기만족, 딸딸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뭐 기본전제야 그렇지만 그래도 사람이 인지상정이라는게 있어서 올림픽 또는 기타 명칭으로 열리는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좋은 성적을 올리면 그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밤을 새우며 응원도 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까운 결과가 나왔더라도 선수를 격려하고 뭐 기타 등등, 좋은 말 많이 갖다붙일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특히 올림픽에서 메달을 가지고 이래저래 장난하는 인간들이 눈에 띄게 된다. 대부분 그 주체는 미국인 경우가 많았고.
며칠전 체조경기에서도 또 오심시비가 불거졌다. 남자개인종합 결선에 오른 무수한 톱랭커들이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서 등위에서 멀어지고, 운좋게 두 명이나 진출시킨 우리나라는 차근차근 점수를 벌면서 나란히 1,2위를 달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뜀틀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던 미국선수가 두 종목에서 연속 최고점을 받으며 일약 1위로 뛰어오르고, 당시 SBS에서 중계를 하던 해설자와 아나운서는 울먹이기까지 하는 준방송사고급 사건이 터졌던 것이랬다.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 인터넷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1) 미국선수가 뜀틀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심판석으로 밀려갈 정도였는데 점수가 9.1이나 나온 것은 이해할 수 없다. 2) 미국선수가 막판 두 종목에서 잘하긴 잘했지만 9.8 이상의 고득점이 나온 것은 이해할 수 없다. 3) 우리나라 선수가 평행봉과 철봉에서 좋은 연기를 보이고도 점수가 9.4 정도만 나온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대략 이런 것이었는데, 워낙 체조라는 종목이 심판들의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점수가 오고가는 것이라 사실 이것 역시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그럴 수 있다” “미국에게 좀 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금메달이 바뀐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와서 뒤집을 수는 없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로 심판판정에 불복하는 등 말썽을 일으키면 오히려 다음 경기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신중론을 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대뜸, 국제체조연맹에서 “오심”을 인정하고 말았다.
뭐, 체조연맹의 발표 요지는 “오심으로 인해 한국선수가 0.1점의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결과를 뒤집지는 않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불씨를 당긴 수준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공식항의가 받아들여지고 판정번복의 빌미를 얻어낸 것은 평가할만한 일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나는 불과 며칠 전까지 미국을 옹호(?)하던 네티즌들을 떠올렸다. 너무 한국의 언론에 치받혀서 냉정한 평가를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여기 미국에서는 그렇게까지 편파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국내 중계팀이 너무 감정에 치우쳐서 객관적인 해설을 하지 못해서 그렇다, 어쨌거나 심판들이 점수를 주는 종목은 심판의 재량권을 인정해주는 부분인데 그걸 나중에 잣대를 들이대서 결과를 뒤집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혹 판정에 불이익이 있었다고 해도 이런 문제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대외 이미지에 좋지 않다, 이런 식의 시각을 보여주던 사람들 말이다.
그 사람들이 악의가 있다거나 간도 쓸개도 없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들 마음 속에 스며들어있는 그런 같잖은 신중론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관련하여 2년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의 오노 사건으로 시끌벅적하던 시절에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당시 내가 서식하던 모 사이트에서 캐나다에 거주하는 50대 남성이라는 분이 올렸던 글을 한 편 읽었는데, 당시 김동성과 오노의 경기 장면 사진을 차근차근 올려놓고 설명하면서 “이처럼 김동성이 확실히 오노를 밀었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좋지않은 성질, 뚜껑을 확 열어버렸던 것이다.
이상의 내 댓글에 대하여 그 인간이 보였던 반응은 대충 이런 식으로 정리된다. “우리나라 언론이 가져다주는 정보는 진실의 50%밖에 안된다. 외국 언론사들을 열심히 뒤져보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오노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2차로 내 뚜껑이 또 확 열려버렸다. 첫번째로 그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 내가 반박한 부분에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바로 “외국언론”에 기대어버렸다는 점에서 그 인간이 논리보다 권위에 의존하는 축이라는 점을 깨닫고 비위가 상했으며, 두번째로 가뜩이나 국내 언론 허접하다고 생각하고 특히 올림픽 기간이면 ESPN 사이트를 더 자주 애용하는 입장인 나에게(우리나라 언론사 사이트에서는 올림픽 관련 속보가 엄청나게 늦고 그나마도 우리나라 선수들 소식 위주라 보나마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치 자기는 캐나다에 사니까 폭넓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있는데 너는 국내 찌라시들이 감정적으로 지껄여대는 소리에 현혹되어 감정으로 흥분하여 떠드는구나, 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단순화해버리는 생각없음을 보았고, 세번째로 이게 다 미국이 연루되니까 그런 거지 다른 나라였으면 이러겠냐? 라는, 당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빨갱이가 대통령되었으니 나라가 큰일났다는 동네 노인네들의 수준낮은 상황인식에서 반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주제에 나라 걱정 국민 걱정하는 꼬라지가 역겨웠던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어린 것이 똘똘하긴 한데 빨갱이가 대통령이 되니까 혼란스러운 사회에 잘못 물이 들어서 방방 뛰는구나. 나처럼 외국에 나와서 객관적으로 세상을 보게되면 그게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되리라” 따위의 충고나 날리려는 것이 가장 내 뚜껑을 높이 날려버렸던 이유였다.
지금같으면야 흥, 미친 노인네, 그러구 말았겠지만 2년전만 해도 좀 젊었는지 (회사에 일도 없었다-_-) 메일로 바가바가 싸워댔다. 뭐, 싸운 것은 순전히 내 입장이고 그 인간 입장에서는 말도 안통하는 어린 것이 자꾸 달려든다는 생각 정도였겠지. 하여튼 그때 한 번 들이받아보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 우리나라 기성세대, 특히 미국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뿍 안고 있는 사대주의성 기성세대들이 안고있는 철통같은 벽이었다. 조금 낫다는 용미론도, 미국이 힘이 쎄니 이용해먹자, 는 식의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주의자들이니 결국 마찬가지다. (그런 수준의 용미론을 보면, 뼈빠지게 일하고 밥이나 얻어먹는 노예가 내가 주인님을 이용해먹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무슨 아큐정전도 아니고) 내가 보는 미국언론은 공정하지만 니가 보는 한국언론은 공정하지 않다는 대꾸… 내가 미국언론도 본다고 하니까 그럴리가 없다는 코웃음… 내가 한국언론 어떤 기사를 보고 속고있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없이 그냥 한국언론은 믿지 말라는 말… 이런 식으로만 흘러가는 논쟁이 답이 나왔을리가 있나. 결론은 우습게도, 그 인간이 당시 우리 동호회에 글을 썼다가 왠 지나가던 사람이 악플을 하나 달았던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우리 동호회 회원이 아니라는 나의 말에 그 사람이 웃기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동호회가 생긴 이래 가입한 모든 회원 아이디를 다 알고 있는 종신총무인 내가 모르는 회원을 그 사람이 우리 동호회 회원이라고 우기면서 끝났다는 말이다. 근거? 없다 그런 것. 솔직히 다른 것은 그냥 다 넘어갈 수 있었는데 막판의 그 어거지에는 정말 나이가 오십 아니라 칠십 먹은 노인네였더라도 아구창을 한 대 날리고 싶을 정도로 열받았었다. 어거지를 써도 그런 어거지를 쓸 수가 있을까.
2년 전의 흥분이 새삼 살아나 조금 오바질하고 있는 것 같은데 -_-; 아무튼 그 당시의 신중론자들, 작게는 아쉽지만 판정이 뒤집어질 수는 없다는 사람들부터 크게는 미국한테 어딜 개기려고 하냐는 사람들까지, 단순한 스포츠 경기 하나를 보면서도 그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이 이렇듯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그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서 아주 뼈에 새겨놓고 말았다. 며칠 전의 그 체조 오심 사건도, 쓸개 빠진 인간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국제체조연맹에서 이례적으로 오심을 인정한 것은 대단한 아량을 베풀어준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이 문제를 놓고 더이상 왈가왈부하면 체조연맹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이쯤에서 끝내자.” 기타 비슷한 의견 등등.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라. 맨 앞에서도 말했듯 이 문제가 우리나라 금메달 하나 더 건져와서 종합순위가 오르고 내리고는 하등 내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이런 문제를 놓고 알아서 박박 기어대는 그 사대주의 근성들, 신중론을 빙자한 노예근성들이 아주 꼴보기 싫은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