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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사랑은 성장하는 것?

2004년 12월 13일

나중에 이 글을 다 읽은 뒤 갑자기 내가 <주말 개봉영화 촌평> 코너에서 이 영화에 대해서 썼던 촌평을 뒤져보고 싶어질 사람들을 위해 미리 밝혀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내가 내렸던 평점은 별 한개 반 이었다. “제목부터 대략 맘에 안든다” 뭐 그런 종류의 촌평이었는데, 별 한개 반이면 뭐 왠만하면 때려죽여도 안본다 그런 식으로 이해해도 별 상관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왜 봤냐 이거지, 문제는. 다른 사람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그 사람 성향이 자신의 홈페이지가 널리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것 같으므로 밝히지는 않겠음) 이 영화에 대한 글을 보다가 (뭐 괜찮았다… 이런 류의 평가는 눈꺼풀로도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사람마다의 평가는 워낙 천차만별이니까) “오사카 사투리가 나온다”는 말에 갑자기 그렇다면 한 번 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버렸던 거다. 개인적으로 만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 중 가장 좋아하는 두 여성이 <아즈망가 대왕>의 오사카와 <야이노마>의 광년이라서, 그놈의 오사카 사투리에 그만 “회가 동했다” 이 말이 되겠다. (이건 혹시, “사투리 페티쉬”??)

다 보고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심경은 이렇다. 주인공들이 막판에 헤어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별 한개 반은 주지 않았을 거다, 라고. (못해도 두개반, 세개까지 줬을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시놉시스를 거칠게 읽어보고, 일본의 유명한 여류소설가가 쓴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이야기라는 말을 듣고, 포스터에 짙게 풍겨나오는 순정+멜랑꼴리스러운 분위기에 심기가 뒤틀리다보니 “흥, 이거 또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순애보 사랑이야기로군!”이라고 지레짐작한 탓에 별 한개 반을 당당하게 날려줬던 것이지, 이런 종류의 영화인 줄 알았었다면 절대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참고로 덧붙이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OST 표지가 훨씬 영화의 전체 분위기와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어쩌다보니 이야기가 눈물의 참회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영화가 “순애보는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처음 품은 것은 주인공 츠네오가 “이미 볼장 다 본 애인이 있고” 거기에 추가로 “작업 중인 다른 여자가 있는” 그런 대학생이라는 점을 영화에서 담담하게 보여주면서부터였다. 나중에 카나에가 조제에게 직접 말하듯, “그 애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그게 정답이더란 말이다. 어쩌면 처음 츠네오가 조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사회복지쪽에 관심이 있다는 카나에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츠네오와 조제가 사랑하게 된 것은 그냥 둘 다 순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뭐 대단한 인류애가 피어올랐다거나 훌륭한 봉사정신이 있어서라거나 그런 거는 결코 아니더란 말이다. 자주 보고,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그냥 도와주고 하다가 서로의 매력을 알고 느끼고 외롭고 그런 종류의 복합적인 감정이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거지, 더이상 뭐는 없더라는 말이다. 다만 남들이 보기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라는 존재감 때문에 두사람의 사랑을 별다르게 받아들였을 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들 만나고 헤어지듯 1년하고도 몇개월의 동거 끝에 두 사람은 사이좋게(?) 헤어지고, 그렇게 영화가 끝나버렸다. 그 순간 내 심정은 아싸가오리더라 이거지. 남녀주인공이 쿨하게 헤어지고 바로 영화 확 끝내버리는 영화, 얼마나 바라마지 않던 거냐 이 말이다. 물론 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사랑에 목매는 수많은 관객들께서는 마지막 츠네오의 울음에 눈끝 코끝 찡해져서 극장을 나오셨겠지만 나야 뭐 그런 거 하고는 하등 상관없는 사람이고, 씩씩하게 주방의자에서 뛰어내리는 조제의 모습이 마지막 장면이라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처음엔 할머니의 구박을 받으며 마치 집에 없는 존재처럼 유모차에 숨겨둬야할 인생이었지만, 우연찮게 그 할머니의 벽을 뚫고 츠네오를 만나면서, 그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츠네오와 세상에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깊은 바다 밑에서부터 올라오고 말았던 거다. 츠네오가 없어지면 다시 바다 밑을 조개처럼 굴러다닐 거라고 조제는 말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츠네오도 조제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깔끔하게 이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츠네오의 마지막 울음은 이제는 더이상 조제에게 내가 필요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조제에게 있어서 츠네오와의 사랑은, 조제가 오랫동안 “바다 밑을 구르면서” 동경해왔던 그 어떤 것으로 향해가는 건널목, 버팀목 정도였을 수도 있다는 거다. 당장은 새벽에 유모차에 몰래 숨어서가 아닌 당당하게 낮에 세상 밖으로 나가 꽃이나 그런 것들을 보는 것에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 호랑이 – 를 함께 보는 것이라거나,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는 것까지도 어쩌면. 그것을 다 해보았으니 이제는 다시 바다 밑을 굴러도 상관없다고 조제는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제는 예전에 바다 밑을 구를 때처럼 외롭지는 않기 때문에 츠네오와의 사랑은 조제를 한 단계 성장시켜주는, 그런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준 셈이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되짚어보자면, 헐리웃 영화들은 대개 사랑을 달콤하게 묘사하고 행복하게 맺으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고, 한국영화들은 사랑의 어떤 비극적인 단면,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잃어가는 무엇을 보여주면서 비극적으로 맺으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은데, (뭐 순전히 내 기분대로 나눈 거니까) 내가 본 일련의 일본식 로맨스물들은 사랑을 하나의 “성장”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더랬다. 다시 이야기하면 헐리웃 영화에서의 사랑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에게 뭔가 하나 부족한 것, 그것이 사랑, 이런 식이라면 한국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도 좋은 것, 그것이 사랑, 이런 식인데, 내가 본 몇 편의 일본영화에서는 아직 모든 것을 갖췄다고는 말할 수 없는 약간은 불완전한 존재들이 지금보다 한 단계 발전하는 어떠한 계기, 그것이 사랑, 이런 식으로 다른 영화에서는 별로 보지 못했던 결론을 도출하는 경우가 많더란 말이다. <러브레터>도 그렇고,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것도 같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쓸 수 있으면 쓰도록 하고) <4월 이야기>까지는 솔직히 ‘이와이 슈운지라는 특정인이 조금 그런 경향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는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나 (이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줄거리는 완전하게 알고있다) 이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까지도 그런 시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흐흠, 조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더라는 거다.

물론 뭐, 헐리웃식 로맨틱코미디나 한국판 신파극 같은 일본산 로맨스영화들을 수십 편 들이댈 수 있는 매니아 여러분들이 계시겠지만, 적어도 저런 시각을 가진 영화들이 일본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아니, 뭐 굳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왜 하필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저런 시각의 영화들이 나오느냐 이런 주제를 말하려는 건 아니니까. 대개의 상투적인 헐리웃영화 한국영화들에서 볼 수 없던 시각을 다른 나라의 영화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거다.
그렇게 사랑을 어떤 완성의 단계, 완성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회화라는 측면에서 최소한의 소통단위로, 그 단계로 인식하고 보여준다는 것, 이거 그냥 우습게만 넘겨버리기 어려운 영화를 그놈의 사투리 페티쉬 때문에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PS. 한국에서 이 영화를 똑같이 만들었다면, 마지막 부분은 엄청난 옥의 티가 되어버릴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이 전동휠체어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타고 다니면서 혼자 씩씩하게 생활할 수 없다. 턱이 얼마나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