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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연인, 결말에 관하여

2004년 8월 17일

소위 ‘할리퀸 로맨스’라 불리는 부류의 소설 중에 내가 읽어본 책은 딱 한편이다. 국민학교 때는 내내 ‘소년중앙’을 보다가, 중학교에 들어갔으니 이제 ‘학생중앙’으로 업그레이드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철없는 생각에 ‘학생중앙’을 샀다가 별책부록으로 끼워준 제목도 기억안나는 소설이었더랬다. (참고로 ‘학생중앙’은 ‘여학생중앙’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뭐 그런 청소년잡지였다)

내용은 뭐, 이쁘고 쭉 빠진 프리랜서 기자 아가씨가 취재를 빙자하여 워떤 겁나게 잘사는 집안의 둘째 도령하고 억지로 썸씽을 만들다가 엉뚱하게 그집 큰 도령하고 어쩔시구리 한다는, 뭐 그런 줄거리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중간에 살짝 야한 (지금 생각하면 하나도 야하지 않지만) 묘사가 나오는 바람에 중학교 1학년짜리가 숨죽이며 읽었던 기억도 난다.

일종의 실수 비슷하게 -_-; 접해버린 할리퀸 로맨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제법 재미었던 것이 사실이다. 손바닥만한 크기에 얄팍한 두께였으므로 왠만한 중편 소설 분량밖에 안됐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시작부터 겁나 이쁜 아가씨와 겁나 잘생긴 (그 주제에 차갑기까지하다) 남자가 줄줄이 등장하면서 밀고 당기는데 흥미진진하더라니까. 흥미진진하기는 했는데, 그후로는 그런 부류의 책들을 별로 가까이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첫째 이유로는 일단 꼬추달린 남자새끼라서 이런 줄거리가 나한테 별로 판타지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여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바뀌어있다면 모르겠으되 쭉쭉 잘빠진 아가씨를 제대로 후리려면 돈많고 잘생겨야된다는 식의-_- 그런 판타지에 끌릴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말이다. 둘째 이유로는 첫대목을 읽는 순간 결말이 너무 뻔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반전을 추구하는 내 성질과도 그리 맞지 않았던 점. 솔직히 이 소설의 첫장면에서 우연찮게 마주치는 남녀주인공이 앞으로 (수많은 역경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서로 지지고 볶고 뽀뽀하고 살게 되리라는 건 굳이 마지막 장 미리 들춰보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섭섭한 것이었기에, 혹시라도 막판에 뜬금없이 여자주인공이 교통사고로 저세상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식의 반전이 기대되지 않는 한 중간과정이 아무리 흥미진진해도 마지막을 기다리는 긴장감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셋째 이유로는 이런 종류의 환상소설보다 당시에는 절라 서사적인 줄거리의 대하소설쪽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여튼 뭐 그랬었다.

한 권밖에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읽은 그 한 권의 할리퀸로맨스가 모든 할리퀸로맨스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란다. (간혹 그런 생각이 들긴 한다) 그런데 얼마전 엄청난 시청률을 땡기다가 종영해버린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보다보니 그때 내가 읽은 유일한 할리퀸로맨스와 왜이리 설정이 비슷해보이던지(다른 부분도 많지만)… 내가 그 부류를 한 권밖에 안읽어서 그렇지 수십 편을 탐독한 처지라면 드라마를 보기가 민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말 뻔히 보이는데 일단 재미있더라는 부분까지도 비슷하더라)

그렇게 뭐, 뻔한 결론의 할리퀸 로맨스로 쫑을 맺었더라면 특별히 더 할 말도 없었을 거다. 골빈 여성들께옵서 박신양이 좋아죽겄다는데 뭐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약기운이 떨어진 남성들께옵서 문윤아-_-;가 이쁘다고 한들 뭐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종영을 바로 앞두고 (주인공이 죽네 사네까지 말이 오가던) 결말이 공개됐는데 그게 뭐 말짱 뻥이라는 결말이라더라. 인터넷 신문기사 뒤지다가 그 기사보고 오홋, 자못 신선한걸, 이런 생각부터 들더라. 그런데 왠걸, 신선하다고 느낀 건 나 혼자였는지, 온갖 인터넷에서는 작가를 죽여버릴 듯이 난리가 나고 있었더랬다. 어차피 뻥인 거 다 아는데, 그 뻥을 뻥이라고 하니까 난리가 난 거다.

하긴 뭐, 그런 부분도 없지 않을 게다. 어차피 뻥이고 판타지라지만 판타지 안에서 이거 뻥이야, 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거. 사람들이 뻥을 뻥으로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판타지는 판타지 자체로 남겨놓고 싶어한다는 거, 그런 것까지 무시하는 거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 드라마의 시청자/또는 할리퀸 로맨스류의 애독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말만을 기대만빵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 단순히 해피엔딩을 바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익숙한 정답 – 할리퀸 로맨스류의 소설들이 흔히 걸어갔던 바로 그 길 – 이 아닌 다른 결말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 이런 생각말이다. 그게 뭐냐 이거지 내 말은. 가뜩이나 없는 정답 만들어 찍어대야 하는 주입식 교육에 지쳐있는 마당에, 드라마까지 정답 맞춰 찍어대야 되냐 이 말이지.

과감하게 말하는데 <파리의 연인>, 다른 건 몰라도 결말은 꽤 잘 긁어준 것 같다. 머리 나쁜 몇몇 인간들은 왜 강태영이 저기도 나오고 여기도 나오고 그러냐고 지랄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