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기병 라젠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재미가 없어서 죽 보지는 않았다. 한국 애니메이션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주인공은 <건담 윙>의 히이로를 닮아 샤프한 넘이고, <라퓨타>와 <나우시카> 비스무리한 설정으로 환경보호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타임 보칸>의 전통적인 악당 이미지를 절묘하게 차용한, 넥스트/신해철의 음악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데, 이게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들은데로 적었다.
내가 본 것은 다른 것 없다. 주인공 메카닉 디자인에서 “한국적 이미지”를 표현했다는 신문 기사를 믿고 그 주인공 로봇만 자세히 살폈다. 자세히. 그 결과 한마디 덧붙여준다. 이런 젠장할!
뭐가 한국적이란 말인가. 상감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문양만 집어넣으면 다인가. 우리나라의 수많은 애니메이터들(나는 아직 우리나라에는 메카닉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사람들이 없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메카닉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미안한 일이지만 뭐 내가 없다고 말한다고 해서 있는 사람이 없어지나. 쓸데없는 곳에 자존심 남발하지 말기 바란다) 대부분이 아무리 일본 애니메이션을 베끼면서 시작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이런 그림을 그려놓고 한국적 디자인 운운한다는 것은 아무리 홍보용 멘트라지만 심한 것 아닌가. 그 사람들은 무엇이 한국적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캐릭터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언제부턴가 애니메이션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캐릭터는 동양계보다는 서양계의 이미지를 중시하게 되었기 때문에 주인공이 한국적으로 생겨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뭐 건담의 주인공인 아므로 레이도 혼혈로 설정되어있고 외국에는 ‘피터 레이’라는 정말 이국적인 이름으로 소개된 바도 있는데, 그 정도야.
물론 캐릭터의 느낌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은 문제가 있겠다. <돌아온 영웅 홍길동>에서 신동헌 화백의 원작과 비스무리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나의 여신님>의 주인공 베르단디를 연상시키는 곱단이 캐릭터에서부터… 그렇지만 뭐 그 정도야… 유럽만화는 디즈니 비슷하게 그리는 판국이고 서극의 애니메이션판 천녀유혼 <소천>도 일본만화를 연상시키는데 캐릭터를 비슷하게 그리는 것 정도는 본인 별로 신경 안쓴다.
그런데 메카닉 디자인에 대해서, 특히나 ‘한국적 디자인’을 표방하는 메카닉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한국적인가. 대부분 로봇을 디자인함에 있어서, 디자인의 모티브로 삼는 것은 ‘군인’의 이미지다. 자쿠는 보병의 이미지를 따왔다고 하고, 건담들은 아무래도 사무라이의 느낌이 강하다. 로마병정이나 전설 속의 거인을 따오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장군’의 이미지를 따왔다고 주장한다. 라젠카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더라. 그러나 그런 주장에는 기본이 안되어있다. 잠깐 딴 소리 같지만 요즘은 서양인들의 개념이 유입되는 바람에 ‘멋진 남성’의 이미지가 ‘역삼각형의 몸매’에 있다. 떡벌어진 가슴과 잘룩한 허리를 말하는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적인 ‘멋진 남성’의 이미지는 공교롭게도 ‘삼각형’이다. 에… 건강상의 이유로 똥배가 어쩌구 하는 얘기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서양에서 상체를 쓰는 그레코로망 레슬링이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힘을 겨루는 놀이였다면, 우리나라는 서로 허리를 붙잡고 다리기술로 승부하는 씨름이 있었다. 팔이나 상체를 쓰기는 하지만 씨름의 기본은 하체와 허리 근력이다. 서양에서는 주먹으로 치고받는 복싱이 발달한 반면 우리나라에는 발차기로 먹고사는 택견이 (뭐 역시 이견이 많지만 본인은 태권도를 우리나라 전통무예라고 별루 생각하지 않는다) 있었다. 삼각형 몸매라는 게 굳이 배가 띵띵하게 나온 사람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떡벌어진 가슴과 잘룩한 허리보다는 튼튼해보이는 허리와 다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얘기다.
태권브이 21 어쩌구 하면서 새로 만드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요즘 돈이 부족한지 제작이 난항을 겪고 있나보다. 하여튼 처음 그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본인이 주구장창 주장하는 것이 있다. “새로운 태권브이는 절대로 떡 벌어진 가슴/어깨와 잘룩한 허리를 가져서는 안된다”였다. 왜냐고? 우리나라 태권도 국가대표 모두 끌어다가 웃통 벗겨봐라. 누가 어깨가 떡 벌어지고 허리가 잘룩한지. 중량급일수록 더욱 그렇겠지만 태권도라는 운동 자체가 사람의 어깨를 벌어지게 하거나 허리를 잘룩하게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위에서 본 라젠카 그림처럼 우리나라 애니메이터들은 로봇! 그러면 서양의 이미지에 젖은 일본 애니메이터의 영향을 받은 탓에 몽땅 어깨를 강조하고 허리를 줄인다. 저런 몸매는 차렷 자세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로봇이라지만 저런 체형으로 지르기, 발차기 도저히 불가능하다.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폼은 절대 나지 않는다. 저런 몸매가 날라차기라도 할라치면 허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심히 불안할 거 같다.
간단히 말하겠다. “한국적 로봇”을 그리고 싶다면, 딱 마주 대했을 때 “단단하고” “빈틈없고” “하체가 튼튼해보이게” 그려야한다. 옛날 이순신 장군의 투구나 베껴서 갖다 붙이거나, 상감자기의 문양이나 베껴서 집어넣을 생각하지말고, 이순신 장군이 갑옷 입고 칼짚고 선 그림이라도 한 장 갖다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이미지를 뽑아내란 말이다. 정말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그때는 내가 “한국에도 메카닉 디자이너가 있다”라고 당연하게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