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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례이야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98년 2월 1일

대대 행정반원들은 야근이 많다. 그날도 무슨 일인지 행정반원들이 총출동해서 야근을 하느라 불행히도 청소 시간이 되도록 일병들이 모두 내무반에 올라가지 못하고 말았다. 행정반원들이 많은 1내무반은 상병 고참이 최말단이 되버렸고, 이에 그만 상병 고참이었던 김 상병이 헤까닥 돌아버렸다. 솔직히 삼례가 고참이고 일도 혼자 하니까 나는 올려보내도 되는데 순전히 자기 혼자 고생하기(고생? 소가 웃겠다) 싫다는 이유로 나를 붙잡아놓았기 때문에 나는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물론 고참한테 대놓고 할 말은 없지만) 점호가 끝나자마자 김 상병은 일병 새끼들 총알같이 튀어올라오라고 전화를 걸었다.(삼례가 자기보다 고참이었지만 그 따위는 무시해버리고) 나를 포함한 일병들은 우르르 올라가서 죽사발로 얻어터졌고 왕고참들한테 따로 불려가서 훈계까지 들어야 했다. (나는 그날 워카발이 턱까지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마침 그 날은 내무반원들이 돈 걷어서 짜장면 회식을 하는 날이었는데, 삼례가 나를 순순히 올려보낸 이유도 우리 몫의 짜장면을 가지고 사무실로 다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쥐어터진 놈이 짜장면은 무슨 짜장면을 챙겨서 돌아가나. 얻어맞은 얼굴로 사무실로 도로 내려갔더니, 젠장 하나뿐인 쫄병이 순전히 자기 때문에 얻어터진 것은 안중에도 없고 짜장면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삼례는 식충이 기질도 다분하다) 그리고는 아까까지 오늘 밤 새워서라도 끝내야 된다던 일감을 당장 때려치우고 내무반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었던지 행정반원들이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 고참됐다고 그렇게 쫄병들을 패는 건 말도 안된다는 소리도 하고, 올라가면 고참들한테 따지겠다고도 하는 것이 아닌가. (짜식, 기특하더군) 그러나 내무반에 들어간 순간,
“삼례냐?” (나를 불러서 따로 야단쳤던 고참이)
“네” (조금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올라와서 짜장면 먹어라”
“(무척 반가운 소리로) 네!”
그리고 삼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