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칠 때 떠나라] 영화를 고르는 선입견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이, 선입견이라는 건 있게 마련이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도 있고, 사물에 대한 선입견도 있고, 사건에 대한 선입견도 있다. 지금 말하려는 건 그중 제법 단순하면서도 일상생활에 밀접한, 영화를 고르는데 있어서의 선입견이다.

이번 주말, 딱히 할 일은 없고 시간은 털털 남고 주머니 사정 별로 삐까번쩍하지 않을 때, 개나 소나 생각하는 것이 영화 관람 되겠다. 그럼 일단 영화를 보러 가자스라, 이렇게 결심하고 나면 현재 극장에 간판 걸고 있는 영화들을 죽 보면서 뭘 봐줄까나… 고민이 시작된다. 이때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기준을 가지고 영화를 고르게 되는데,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먼저 고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좋아하는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먼저 고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국영화만 무조건 고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스케일 큰 대작액션영화부터 고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배우가 나온 영화를 먼저 제껴놓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남들 다 본 영화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들 아무도 안 본 영화만 골라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극장에 가서 시간 맞는 영화 아무거나, 이렇게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을 거라는 말이다.

나로 말하자면, 일단 나는 “이번 주말에 영화를 보자. 근데 뭘 보지”라는 명제부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겠다. 늘상 강조하지만 본인은 영화매니아가 아니다보니, 남들이 “점심먹자, 그런데 뭘 먹지”라고 말하듯 “영화보자, 근데 뭘 보지”가 영 가슴에 와닿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보고싶은 영화가 생기면 영화를 보는 거지, 영화보는게 무슨 하루세끼 밥먹듯이 꼭 해야되는 일도 아닌데 왜 영화를 보자, 그런데… 라는 의사결정순서가 이뤄진단 말인가. 진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거 뭐 대충 이해했다치고, 내가 영화를 고르는 제일 가는 기준은 첫째도 둘째도 “남다른 이야기”다. 그게 꼭 줄거리가 특별한 경우를 말하는 건 아니고 (그런 경우가 가장 많지만서도… 그래서 역으로 로맨틱코미디를 싫어하니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나 중간중간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가 있는 경우도 포함된다. 그런데 그런건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모르잖아. 그렇다보니 본의아니게, 내가 영화를 고를 때는 ‘감독’을 눈여겨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무래도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성향을 알고 있으면, 그런대로 처음 영화를 고를 때 가졌던 기대(이걸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다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더라는 말이다.

‘장진’이라는 감독 영화는 일단 고르고 본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요렇게 멀리 돌아왔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컴팩트하게 팍! 정리하는 능력이 많이 모자라다) 일단 장진 감독의 영화(연극도 마찬가지)는 아이디어 자체가 돋보이고, 그걸 풀어가는 능력도 꽤 재기발랄하다. (딱 하나 맘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현실 속에 녹아있는 판타지에 대한 집착 정도일까…) 늘 그렇듯 극장에서 영화보는 거 썩 내켜하지 않는 성미라 (무릎 아프다… 요즘 극장들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극장에 영화가 걸리자마자 달려가서 보는 정도는 아닌데, 장진 영화라면 그래도 일단 멈추고 돌아보는 수준은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난데없이 장진 감독의 영화가 거의 동시에 두 편, 일주일의 시차를 두고 개봉을 한다지 뭔가. (물론 한 편은 장진이 감독한 영화는 아니지만) 게다가 또 하필 그무렵에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만 할 일이 생기고 말아서, 다른 허접한 영화를 보느니 장진 영화를 보자, 라고 생각해보니 둘 중 하나를 골라야되는 상황이 돼버린 거다. <웰컴 투 동막골>과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두 편의 영화를 놓고 그렇게 별로 심각할 리 없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다가 내가 고른 영화는, <박수칠 때 떠나라>였다.

참고로 내가 <박수…>를 고른 시점은 두 영화 다 개봉해서 <…동막골>이 신나게 흥행하고 있을 때였다. 잘 나가는 영화 별로 안좋아하는 내 심뽀가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 동막골>은 다른 장진의 영화에 비해서 상투적인 내용 같고, 남북화해 같은 주제의식도 좀 도덕교과서스럽고 구태의연해뵈고, 무엇보다 장진에게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분이라고 밝힌 바 있는 그 <판타지스러움>이 <…동막골>에는 만연해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에 반해 <박수…>는 범죄스릴러라는, 내가 일단 먹고 들어가는 장르인데다가 현행범 취조를 생중계한다는 시놉시스가 꽤 사회풍자적인 느낌도 강할 것 같았다. (이런 것 또 내가 좋아한다) 범죄스릴러에 판타지가 나와봤자 무당이 나와서 신들려 범인 잡는 것 말고 별다른 거 있을라구, 라는 생각도 들었고.

하여 딩가딩가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 초반에는, 대책없이 포악해뵈는 검사(차승원)과 그 검사와 마주 앉아 선문답 수준의 유머를 구사하는 피의자(신하균)의 모습을 보고 혼자 낄낄거리며 (극장에서 나 혼자 웃었다는 뜻은 아니다) 내 오랜 선입견이 들어맞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게 진짜 범죄스릴러에 가까운 형식의 영화로 점차 변질(?)되어가기 시작하더란 말이다.

그렇지, 뭐, 원래 범죄스릴러영화였다. 그런데 영화 초반부에 집중적으로 보여주던 ‘살인사건 수사가 생중계되는 사회에 대한 풍자’는 조금씩 희석되고, 피의자에게 야자까고 폭력 휘두르는 등 영 대책 없어 보이던 검사는 갑자기 그 태도가 사실은 너무나 범인을 잡아서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의지에 불타서라는 식으로 변질(?)되고, 영화도 점점 그 검사의 속내(?)와 발맞춰 “그럼 누가 범인일까~요”로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더란 말이다. 어허라, 이거 아닌데. 초반의 풍자적인 기세를 유지하다가 소뒷걸음치다 쥐잡는 식으로 범인 잡고 그게 생중계의 큰 공이라도 되는 양 떠벌리면서 마무리짓는게 나았을지도 모르고(사견임), 아니면 차라리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냐’에 집중해서 영화를 풀어갔던가, 해야지, 이 무슨 대변기에 바지 내리고 앉았다가 소변만 시원하게 누고 일어서는(남자 기준) 형국이란 말인가.

거기에 결정적으로, 그놈의 장진 감독의 판타지 선호가 끝끝내 내 우려를 현실화시키고 말았으니, 정말 무당 불러서 굿을 할 줄 내가 어떻게 알았냐구. 게다가 그 무당굿이 초반의 기세가 이어졌더라면 검사와 방송사가 결정적으로 대립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는데, 판타지를 너무 사랑하시는 장진 감독께오서 무당으로 하여금 범인을 잡아버리는(그게 진범이건 아니건 간에) 결말을 내려주심으로써 영화 초반의 풍자가 완전히 훼손되어버리더란 말이다. 이쯤 되면 TV생방송이라는 장치는 풍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범인을 잡는 굿을 집어넣기 위한 장치라고 보는게 더 옳다. (멀쩡한 검사들이 살인사건 발생 48시간만에 범인 잡기 힘들다고 무당을 불러올리는 없으니까) 결국은, 시놉시스에 속은 내가 혼자 헛물켜며 좋아했다는 이야기밖에 안되는 거다.

분명 장진 감독 특유의 대사빨, 상황설정, 그리고 나와 묘하게 들어맞는 웃음코드는 <박수…>에서도 여전했다. 문제는, 이게 감독의 의욕과잉인지 아니면 나의 과잉기대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작은 소품 영화 두 편 정도를 만들 수 있는 꺼리를 무리하게 대작 영화 한 편으로 만들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는 기분이 든다는 거다. 대작이라고 하긴 좀 그런가. 뭐 하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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