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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여자] 소심한 남자들을 위한 판타지

2004년 10월 18일

세상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져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간혹 세상에는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밥 먹고 똥 싸고 하는 그런 생리적인 문제 말고, 밥은 하루에 세 번 먹고 똥 싸면 물 내리고 하는 사회규범적인 문제 말이다.

물론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뭐 사회규범씩이나 들이대면서 주절거릴 문제는 아니기도 하지만 -_-; 하여튼 시작하자면 이렇다. “여자가 먼저 남자 좋다고 하면 안된다”도 분명히 그런 범주에 들어가는 문제란 말이다. 거기서 파생시키면 당연히 프로포즈는 남자가 하는 거고, 뭐 흔히 말하는 “작업”도 남자가 먼저 들어가줘야 되고, 장단 맞추기 위해서 여자는 뭐 좀 튕겨주고, 사랑이고 연애고 어쨌거나 이런 공식대로 대충 알콩달콩 흘러가는 거라고들 다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확실히 사회규범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선입관에 가까운 걸지도)

그 연장선상에서 일부 ‘소심한’, 소위 ‘남자답지 못한’ 남자들에 대해서 논해보도록 하자. 굳이 소심이라는 단어씩이나 붙이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대뜸 쫓아가 박력있게 고백하거나 주도면밀하게 작업해서 꼬시는 남자들보다는 적어도 며칠은 혼자 가슴앓이 해보는 남자가 더 많다고 생각되지만, 어쨌거나 상대방이 보편타당한 사회적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있는 여자라면 혹여 이쪽 남자가 맘에 들어있다고 한들 남자가 가만히 있는데 먼저 찾아와서 들이대는 짓을 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남자가 먼저 표현해야” 되는 것이고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면 여자친구를 만들 가능성 역시 제로에 가까와진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소심한 남자들은 괜히 혼자서 베갯머리 붙잡고 끙끙 앓다가 이따위 상상의 나래에 빠질 가능성 또한 다분하다고 하겠다. “아씨, 어디서 여자 하나 뚝 안떨어지나…” 진짜로 하늘에서 여자가 하나 뚝 떨어지라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당신을 좋아합니다”라고 남자답게(?) 먼저 고백해줄 여자가 혹시 하나 없을까 상상하게 된다는 말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럴 가능성 무척 제로에 가깝지만 뭐 생각도 하지 말라는 법 있나. 영화 <아는 여자>는 바로 그 “소심한 남자들의 판타지”에 아주 적절하게 부합하는 내용이더라.

솔직히 아무리 없이 사는(?) 남자라도 왠 여자가 당신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들어오면 무조건 감사합니다, 하지 않는다. 주제에 이것저것 따져보고 재보게 돼있다. (뭐 여자들 심리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흔히들 갖는 선입견이 “오죽 남자가 안꼬이면 지가 먼저 꼬리를 치겠는가”라는 생각일테고, 또 이런 선입견은 대부분 맞는다는 슬픈 현실에도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는 여자>에서처럼 뭐 확 이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독특하고 귀여운 이나영 같은 여자가 수 년 동안 자신을 좋아했다고 생각해봐라. 아싸 가오리가 따로 없다. 장진 감독의 영화가 상당히 판타지스러운 것은 잘 아는 바이지만, <아는 여자> 같은 경우는 – 물론 영화에서도 죽어가는 사람하고 대화를 나누는 등 예전의 판타지 요소가 남아있지만 – 좀 독특한 판타지를 다루고 있더란 말이다. 까놓고 말해서, 이나영 정도 되는 여자가 씨 왜 정재영 같은 남자를 좋아하겠냐 이거다. 좋게 말해서 판타지고 나쁘게 말해서 이거 쌩 구라 아니냐 이거다. 돈많고 잘생긴 왕자님이 가난하지만 이쁘고 맘착한 신데렐라를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지, 신데렐라는 막말로 이쁘고 착하기라도 했다 치자. 가진 것도 없고 비전도 없는, 솔직히 잘생긴 것 같지도 않은 정재영을 이나영 정도 되는 여자가 왜 좋아하겠냐고. 신데렐라 보다 훨씬 황당한 구라 아니냐 말이다.

개인적으로 장진 감독과 유머 코드가 좀 맞는 편이라 영화 보는 내내 남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장면에서 열심히 낄낄댄 입장이기 때문에 <아는 여자>가 말도 안되는 황구라영화다 이런 소리를 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참고로 내가 제일 웃었던 장면은 좀도둑이 “잘은 몰라요”라고 말하는 장면하고 의사가 “이게 이러면 안되거든?” 하는 장면 정도를 꼽고 싶다) 말도 안되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사랑 때문에 병도 낫고 재기도 하고 (뭐 영화를 보면 꼭 그것이 사랑 때문은 아니지만, 꼭 그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정도의 스토리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영화를 보고 웃고 즐기는 것은 즐기는 것이고, 어쨌거나 그 내용은 쌩구라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혹여 이 영화를 보고 어디선가 나를 맘 속으로 좋아해주는 아리따운 여성이 있지 않을까 꿈꾸는 소심한 남자가 있을까봐 굳이 하는 이야기다. 그런 여자 없다. 꿈 깨시라.